동(東)지중해 대형 가스전 ‘1등 복권’ 찾은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등 7개국 모인 협력기구 조성 러시아 의존도 높은 유럽, “이집트 가스 사겠다” ‘경제난’ 숙제 풀며 장기집권 노리는 시시 대통령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
요즘 이집트 카이로 시내 어디서든 어지럽게 걸려있는 현수막을 볼 수 있다. ‘현대판 파라오’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65)의 3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에 참가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CNN 등 외신은 20~22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약 88.83%가 찬성해 개헌안이 통과됐다고 23일 전했다.
국민투표로도 쉽지 않지만, 시시 대통령의 독주를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 조금이라도 정권을 비판하면 허위사실 유포 등을 이유로 감옥에 끌려간다. 먹고살기 힘든 이집트인에게 ‘민주주의 실현’은 너무나 먼 목표일 수도 있다. 올해 3월 기준 실업률은 34%, 물가 상승률은 14%에 달한다. 이집트에서 ‘밥’ 먹는 문제만 해결해줘도 통치에 큰 어려움은 없다는 인식이 많다. 그나마 이웃 국가와 비교하면 위안을 얻을 수준이다. 알제리와 수단은 빵 값을 올렸다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 ‘이집트의 로또’ 조호르 가스전
많은 이들은 “중동의 모든 나라에선 원유가 펑펑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여긴다. 완벽한 오해다. 이집트는 에너지 수입국이다. 심지어 세계 기름값을 좌지우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도 아니다.
이집트도 한 때 석유를 팔아 돈을 벌었다. 하지만 재정적자 등으로 추가 투자 등에 소홀해 주요 유전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위기를 맞았다. 2009년 석유 소비량이 생산량을 역전한 후 10년째 에너지 수입국 신세다. 천연가스 산업 역시 2000년 대 초반 잠시 호황기를 맞았지만 정치 불안정, 투자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상황은 2015년 8월 급반전했다. 지중해에 면한 북부 조흐르(Zohr) 연안에서 ‘지중해 가스전 역사상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 추정 매장량 최대 30조 입방피트의 가스전이 발견됐다. 원유로 환산하면 한국 한 해 석유 수입량(9억4000만 배럴·2017년)의 5배가 넘는 약 55억 배럴에 달한다. “이집트가 지중해에서 복권에 당첨됐다”는 평이 나온 이유다. 군인 출신으로 딱딱하고 권위적인 모습만 대중에게 보였던 시시 대통령도 당시 TV 연설에서 “우리가 골을 넣었다”고 환하게 웃었다.
● 인근 국가를 모은 이집트의 리더십
노다지나 다름없는 가스전을 발견한 것은 이집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웃 이스라엘, 키프로스 등도 동(東)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와 비슷한 복권을 주웠다. 특히 이스라엘은 “선지자 모세가 길을 잘못 들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땅으로 이스라엘인을 이끌었다”는 씁쓸한 농담을 할 정도로 자원 빈국이었지만 2009~2010년 잇따라 막대한 가스전을 발견했다.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도 지난달 400억 달러(약 45조7000억 원) 규모의 가스전을 발견했다.
이 때부터 이집트의 외교적 영민함이 발휘됐다.
이웃 나라와의 ‘경쟁’보다 ‘협력’을 택했다. 이집트는 지난달 이스라엘과 키프로스는 물론이고 요르단, 그리스 등 동지중해 주변 7개국을 모아 아예 ‘동지중해 가스포럼(EMGF)’을 만들었다. “지중해 동부지역을 세계 천연가스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자”는 보기 좋은 목표도 제시했다.
EMGF 회원국들은 지난달 카이로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매년 회의를 통해 △천연가스 수요 및 공급량 논의 △천연가스 개발을 최적화할 인프라 구축 △경쟁력 있는 가격 협의 △회원국 무역관계 향상 등 경제 전 부문에서의 협력을 약속했다. 마치 OPEC 회원국들이 석유 생산량을 고무줄처럼 늘리고 줄이며 전 세계 석유 값을 조절해 산유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똘똘 뭉치는 모습과 흡사하다.
EMGF 회원국 간 협력 속도도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약 150억 달러(약 16조 원)의 천연가스 수출 계약을 맺었다. 2012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에 의해 파괴된 이집트 시나이반도 내 가스관도 다시 연결해 유럽으로 수출하기로 했다. 유발 슈타이니츠 이스라엘 국가인프라·에너지·수자원 장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 및 이스라엘 천연가스가 이집트 시설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다는 사실을 ‘평화의 단추’로 이어지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과거 수차례 중동 전쟁을 겪으며 앙숙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극히 이례적인 발언이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앞세우는 외교적으로 의미있는 발걸음을 만든 것이다.
● 러시아 탈피를 가능하게 해줄 이집트 가스
미국 에너지관리청(EIA) 등에 따르면 세계에서 천연가스 매장량이 가장 많은 국가는 러시아다. 이어 이란, 카타르,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뒤따른다.
현재 유럽 주요국들은 대부분 러시아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전체 가스 수입의 51%를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오스트리아·핀란드·헝가리는 아예 수입 가스가 100% 러시아산이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량 조절로 이미 피해를 경험했던 유럽 국가로선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고, 새로운 공급자를 찾는 것이 큰 과제였다는 의미다. 이들은 이집트가 이런 난제를 풀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은 “다음 달 2일 만료되는 한국 일본 등 8개국에 대한 이란산 원유 수입금지의 ‘한시적 예외’를 연장하지 않겠다”고 22일 밝혔다. 미국이 대(對)이란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의 원유 수입 경로까지 옥죄듯 에너지 수급에는 국제정치의 복잡다단한 함수가 늘 뒤따른다. 단순히 가격이 적당하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고 싶다고 늘 살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유럽 입장에서는 서방과 항상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러시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 2위지만 ‘중동 시아파 맹주’로서 서방과 껄끄러운 관계를 갖고 있는 이란은 부담스러운 존재다. 이집트, 이스라엘이 여러모로 거래하기 편한 상대다. 설사 이집트가 ‘독재 국가’일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집트에도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및 키프로스와 모두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터키다. 터키는 현재 천연가스의 70%를 러시아, 20%는 이란에서 수입하고 있다. 올해 2월 “키프로스 연안에서 독자적 에너지 시추작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주변국들이 모두 가스전을 발견하고 있으니 터키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최근 터키 정부는 키프로스와 협력하는 세계 주요 에너지 기업들을 겨냥해 “지중해에서 터키를 배제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서슬 퍼런 경고까지 내놨다. 이집트의 천연가스 수출을 방해하려 수차례 가스관을 파괴했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도 다른 위험 요인의 하나이다.
지난해 6월 카이로에 부인한 뒤로 이집트 정부가 주최한 여러 행사에서 외신기자, 한국 및 각국 주재원들을 만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누던 얘기가 있다. “시시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당장 이번 달에만 20년간 집권하던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 30년 간 집권한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사퇴했다. 이웃 국가 독재자들이 속속 물러나면서 일각에서 “시시 대통령의 장기 집권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대화의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 정권의 입지에는 큰 타격이 없다”로 끝났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보물처럼 등장한 천연가스가 이집트 경제 성장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덕분일 것이다. 천연가스가 시시 정권의 장기 집권 토대라는 분석은 당분간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시 대통령이 천연가스라는 뜻밖의 ‘보물’을 얼마나 현명하게 사용할 지에 따라 그의 결말도 상당히 달라질 것이겠지만 말이다.
카이로=서동일 특파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