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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가스전 로또’… 유럽의 지정학 바꿀 비밀병기

입력 | 2019-04-25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이집트 북부 조흐르 가스전, 지중해 가스전 역사상 최대규모
러시아 의존도 높은 유럽 관심… 독재 장기화의 실탄 우려도




이집트 북부의 조흐르 가스전 전경. 이집트는 2015년 발견된 이 ‘지중해 최대 가스전’을 통해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에너지 허브가 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사진 출처 Eni 웹사이트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이집트에서 발견된 천연가스는 유럽의 지정학을 바꿀 비밀병기다.

풍부한 석유가 당연한 것처럼 인식된 중동에 자리 잡은 나라이지만 사실 이집트는 에너지 수입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이집트가 에너지 공급으로 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꿀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으니, 이만큼 놀라운 반전도 없을 것이다.

그건 유럽의 행보와 관련이 있다. 유럽 상당수 국가는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하지만 서방과 항상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러시아는 부담스러운 존재다. 러시아가 정치적 목적으로 가스 공급을 차단해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던 경험은 유럽 주요국들에는 살을 에는 아픔이었다.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 2위지만 ‘중동 시아파 맹주’인 이란도 유럽 국가로서는 마찬가지로 껄끄러운 존재였다.

상황이 급반전한 것은 2015년 8월. 지중해에 면한 북부 조흐르(Zohr) 연안에서 ‘지중해 가스전 역사상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 추정 매장량 최대 30조 ft³(세제곱피트)의 가스전이 발견됐다. 이집트 가스가 뭔가 물건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유럽은 러시아를 피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셈이다. 설사 이집트가 ‘독재 국가’일지라도 말이다. 역시 국익 앞에선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일까.


○ 러시아 탈피를 가능하게 해줄 가스

국제사회에서 에너지는 정치력을 뜻한다.

미국 에너지관리청(EIA) 등에 따르면 세계에서 천연가스 매장량이 가장 많은 국가는 러시아다. 이어 이란, 카타르,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순이다. 에너지는 국가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그러니 에너지 공급국은, 수요자의 처지에서 보면 그야말로 ‘슈퍼 갑’에 해당한다.

현재 유럽 주요국은 대부분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전체 수입 가스의 51%를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오스트리아, 핀란드, 헝가리는 아예 수입 가스가 100% 러시아산이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량 조절로 이미 피해를 경험했던 유럽 국가로선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고, 새로운 공급자를 찾는 것이 큰 과제였다는 의미다.

상당수 선진국인 유럽 국가들은 겨울만 되면 러시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 딜레마가 있었다. 난방용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잠기면 자국 국민의 원성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유럽 국가들로선 이집트가 이런 난제를 풀어줄 기대주로 갑자기 떠올랐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이집트도 한때는 석유를 팔아 돈을 벌었다. 하지만 재정적자 등으로 추가 투자 등에 소홀해 주요 유전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위기를 맞았다. 2009년 석유 소비량이 생산량을 역전한 후 10년째 에너지 수입국 신세다. 천연가스 산업 역시 2000년대 초반 잠시 호황기를 맞았지만 정치 불안정, 투자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조흐르 가스전을 발견한 것이다. 규모를 원유로 환산하면 한국의 한 해 석유 수입량(9억4000만 배럴·2017년)의 5배가 넘는 약 55억 배럴에 달한다. 군인 출신으로 딱딱하고 권위적인 모습만 대중에게 보이던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65)도 당시 TV 연설에서 “우리가 골을 넣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에너지 허브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 에너지 산업의 패권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 중동 산유국에서 미국, 러시아 등 천연가스 생산국으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20년 후 세계 에너지 수요의 25%를 천연가스가 충당할 것”이란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낙관적인 예측도 이런 이집트의 꿈을 뒷받침했다.


○ 인근 국가를 모은 이집트의 리더십

노다지나 다름없는 가스전을 발견한 것은 이집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웃 이스라엘, 키프로스 등도 동(東)지중해 연안에서 이집트와 비슷한 복권을 주웠다. 특히 이스라엘은 “선지자 모세가 길을 잘못 들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땅으로 이스라엘인을 이끌었다”는 씁쓸한 농담을 할 정도로 자원 빈국이었지만 2009∼2010년 잇따라 막대한 가스전을 발견했다.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도 지난달 400억 달러(약 46조 원) 규모의 가스전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발휘된 이집트의 외교적 영민함은 놀라울 정도다.

이웃 나라와의 ‘경쟁’보다 ‘협력’을 택했다. 이집트는 지난달 이스라엘과 키프로스는 물론이고 요르단, 그리스 등 동지중해 주변 7개국을 모아 아예 ‘동지중해 가스포럼(EMGF)’을 만들었다. “지중해 동부 지역을 세계 천연가스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자”는 목표도 제시했다.

EMGF 회원국 간 협력 속도도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약 150억 달러(약 17조 원) 규모의 천연가스 수출 계약을 맺었다. 2012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에 의해 파괴된 이집트 시나이 반도 내 가스관도 다시 연결해 유럽으로 수출하기로 했다. 유발 슈타이니츠 이스라엘 국가인프라·에너지·수자원 장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천연가스가 이집트 시설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다는 사실을 ‘평화의 단추’로 이어지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수차례 중동 전쟁을 겪으며 앙숙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극히 이례적인 발언이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앞세우는, 외교적으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만든 것이다.

유럽이 주목하고 기대를 품어도 괜찮을 스마트한 행보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빨리 이집트가 세계 천연가스 생산의 허브가 됐으면 좋겠다”는 속내가 진하게 느껴진다. 프랑스 환경전문 매체 Enviro2B는 최근 “2025년경 이집트가 유럽 에너지 수요의 22%를 책임질 것”으로 내다볼 정도였다.

물론 이집트에도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및 키프로스와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터키다. 천연가스의 70%를 러시아에서, 20%는 이란에서 수입하는 터키는 올해 2월 “키프로스 연안에서 독자적 에너지 시추 작업을 시작한다”고 경쟁 대열에 합류했다.


○ 이집트에선 독재 장기화의 실탄

요즘 이집트 카이로 시내 어디서든 어지럽게 걸린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현대판 파라오’ 시시 대통령의 3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에 참여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CNN 등 외신은 20∼22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약 88.83%가 찬성해 개헌안이 통과됐다고 23일 전했다.

천연가스 무기까지 장착한 시시 대통령의 독주를 막을 방법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조금이라도 정권을 비판하면 허위사실 유포 등을 이유로 감옥에 끌려간다. 먹고살기 힘든 이집트인에게 ‘민주주의 실현’은 너무나 먼 목표일 수도 있다. 올해 3월 기준 실업률은 34%, 물가 상승률은 14%에 달한다. 그래도 이집트에서 ‘밥’ 먹는 문제만 해결해줘도 통치에 큰 어려움은 없다는 인식이 많다.

그나마 이집트 국민은 이웃 국가와 비교하며 위안을 얻고 있다. 빵값을 올렸다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직면한 알제리 및 수단과는 처지가 다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시 대통령의 장기 집권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지난해 6월 카이로에 부임한 뒤로 이집트 정부가 주최한 여러 행사에서 외신기자, 한국 및 각국 주재원들을 만날 때마다 나눈 얘기가 있다. “시시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당장 이달에만 20년간 집권하던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 30년간 집권한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사퇴했다. 이웃 국가 독재자들이 속속 물러나자 일각에서 “시시 대통령의 장기 집권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대화의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 정권의 입지에는 큰 타격이 없다”로 끝났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보물처럼 등장한 천연가스가 이집트 경제 성장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덕분일 것이다. 천연가스가 시시 정권의 장기 집권 토대라는 분석은 당분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시 대통령이 천연가스라는 뜻밖의 ‘보물’을 얼마나 현명하게 사용할지에 따라 그의 결말도 상당히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