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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문권모]새로운 이야기의 시대

입력 | 2019-04-27 03:00:00

판타지 등 드라마 장르 다양화… 할리우드에 맞설 작품도 나와야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가 세상을 만들었고, 사람을 만들었다. (중략) 이야기, 세상, 사람은 삼위일체이다. 그 셋 중에 어느 하나를 제외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이야기가 소멸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질 것이다.”

대산문화 2012년 여름호에 실린 극작가 이강백 씨의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중 한 대목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야기에 중독된 존재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에서 저절로 ‘불’이 켜진다. 이야기꾼은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드라마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낸 스토리텔링 형태를 통틀어 가장 발전된 것 중 하나다. 엄청난 돈을 들이는 영화보다 덜 화려하지만, 훨씬 오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요즘엔 영화만큼 거액을 투입하는 대작 드라마도 흔하다. 방송가엔 ‘드라마는 작가, 예능은 PD’란 말이 있다. 스토리는 드라마의 생명이다. 최근 드라마 작가의 주가가 예전보다 훨씬 올랐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고 있고, 방송 플랫폼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드라마 수요가 크게 늘어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09년 국내에서 편성된 드라마는 87편이었는데 지난해에는 130여 편으로 늘었다.

이런 와중에 국내 방송가에선 ‘새로운 이야기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드라마가 늘어 경쟁이 심화되면서 내용과 형식을 차별화하고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숫자가 적을 때와 달리 지금은 ‘대박’ 아니면 ‘쪽박’이다.

드라마의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장르의 다변화다. 예전에는 로맨스, 가족물이 주를 이뤘다. 간간이 의학, 법정 드라마가 나왔지만 조금 과장하면 병원에서 연애하고, 법정에서 연애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장르물(스릴러, SF, 호러 등)이 많아지고 있다. 채널A 자체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나온 드라마 4편 중 1편이 장르물이다. 요즘엔 전형적인 장르물 외에 게임 속 세상을 다루거나(‘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호러물과 형사물을 합친(‘손 the guest’) 작품까지 등장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특히 디테일에서 장족의 발전이 이뤄지는 중이다. 시청자가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리얼리티는 개연성에서 나온다. 이야기가 그럴듯해야 몰입감이 생긴다.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설정과 묘사의 디테일이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시대적 고증이나 직업의 리얼리티가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다만 문제는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도전이 해외에서 얼마나 통할지다.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의 수출은 아시아 중심이었고, 할리우드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콘텐츠 업계의 한 지인은 “한국 드라마는 ‘장기’인 로맨스 장르에서 한류 스타에 힘입어 틈새를 뚫었다”고 설명했다. 더 많은 자본과 더 높은 제작 역량이 필요한 장르물에서 한국 작품이 메이저 시장을 뚫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서구 장르물은 역사도 길고 내용도 풍부하며, 자본도 많다. ‘왕좌의 게임’처럼 자체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기도 하며, 마블과 DC코믹스처럼 수많은 영웅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이어 새 이야기를 창조하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의 질적 변화는 사회 전반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상상력과 호기심은 결국 사회 변화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문명의 황금기에는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 작품이 넘쳐나지 않았나. 한국 드라마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까. 다른 분야에서 그랬듯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문권모 채널A 콘텐츠편성전략팀장 mike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