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올초까지 화재 20건… 늑장대책 한숨
한국 제조업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손꼽히던 ESS 산업이 지난해 5월 처음 화재가 발생한 이후 만 1년이 지나면서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ESS는 2차 전지 기술을 활용해 남는 전력을 저장해뒀다 부족할 때 쓰거나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는 장치를 말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지난해 5월부터 올해 1월까지 20건에 이르자 정부는 현장 조사단을 급파하고 정밀 진단이 끝나지 않은 ESS 사업장의 가동을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 현재 전국 1490곳의 ESS 사업장 중 50% 가까이가 멈춰선 상황이다.
업계에서도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안전 조치를 취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에 동의하고 다중이용시설을 중심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올해 1월에는 민간사업장 중에서도 별도 건물에 ESS가 설치돼 있지 않은 곳은 원칙적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문제는 당초 올해 3월로 예정돼있던 조사결과 발표가 올해 5월로 한 번 미뤄진 데에 이어 다시 6월로 기약 없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귀현 국가기술표준원 제품안전정책과장은 29일 “공식적으로 3월 또는 5월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며 “상반기 중에는 원인을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명확한 사고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섣불리 ESS를 재가동할 수는 없지만 기업들로서는 답답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안전과 관련된 문제라 공무원들이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부처의 대응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는 화재 원인 분석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기업들이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정부에 중간조사 결과라도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여기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대책을 내놓아 시장을 일단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마치 응급실에 있는 환자에게 응급주사는 놔주지 않고 일반 병실을 갈 수 있을 때까지 버티라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자금 운용 여력이 없는 중소·중견업체들은 시설 가동 중단 기간이 길어지면서 한계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올해 들어 ESS 신규 발주는 ‘0건’. ESS 사업 구조상 대부분 대출을 낀 중소·중견업체들이 최종 운영하기 때문에 가동을 중단하고 전력 판매를 멈춘 상태로는 사업자들이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ESS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 산업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동안 세계 시장의 80%를 장악해 온 LG화학과 삼성SDI 등 주요 배터리 기업들은 올해 1분기(1∼3월) 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ESS 매출 부진이 주요 원인이다. 특히 해외에서는 한국산 배터리에 대한 신뢰도에 의문까지 제기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한국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는 사이 중국 업체들은 한국시장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세계 1위인 중국 CATL은 이달 16일 유진그룹의 ESS 계열사인 유진에너팜과 ESS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김지현 jhk85@donga.com·황태호·허동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