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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한규섭]주식 논란에 묻힌 헌법재판관 검증

입력 | 2019-04-30 03:00:00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논란 끝에 임기를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 재판관에 대한 검증은 이 재판관과 가족의 주식 거래를 둘러싼 의혹에 집중됐다. 이마저도 진보 진영에서는 문제의 핵심인 이해 충돌 가능성은 외면한 채 ‘자본주의에서 주식 투자가 왜 문제냐’ ‘부동산 투기보다는 낫지 않으냐’는 논리를 내세웠다. 진보 이념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주장이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이해 충돌 가능성의 확실한 근거를 내놓지 못한 채 ‘높은 수익률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포퓰리즘적 논리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 역시 보수 이념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국회는 선거제도 개편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아비규환 상태다. 소위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선거제도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 시작된 대혼란이다. 반면 이 재판관 임명이 헌법재판소에서 유권자들의 대표성을 강화시킬지, 약화시킬지에 대한 논쟁은 끝내 공론화조차 되지 못했다. 헌재의 대표성이야말로 현재의 정치적 극단 대립을 야기한 국회의 기계적 대표성 못지않게 중요한데도 말이다.

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헌재 전원합의체 판결을 분석한 바 있다. 2014년 4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2년 6개월간 당시 헌법재판관 9인(강일원 김이수 김창종 박한철 서기석 안창호 이정미 이진성 조용호)이 내린 671건의 결정을 대상으로 했다. 재판관들의 의견이 서로 얼마나 유사한가를 분석하는 통계모형을 적용해 재판관 사이의 상대적인 진보(―)와 보수(+) 성향을 추정했다.

우선 지명 주체에 따라 매우 다른 판결 성향을 보인 점이 두드러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김창종 재판관(1.228)이 가장 보수적인 성향으로 나타났다. 박 전 대통령이 지명한 조용호 재판관(0.897), 당시 새누리당이 추천한 안창호 재판관(0.478),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이 지명한 서기석 재판관(0.406)과 박한철 재판관(0.343)이 뒤를 이었다.

반면 당시 민주통합당이 추천한 김이수 재판관(―1.228)은 가장 진보적인 판결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으며 양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이진성 재판관(―0.451), 여야가 합의로 지명한 강일원 재판관(―0.309),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이정미 재판관(―0.043) 순으로 진보적이었다.

이는 법의 해석이 재판관의 성향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각 후보 당선 시 대법원 구성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논쟁이 벌어진다.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헌재의 대표성이 사회 변화의 방향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 낼까. 분석에 포함된 671건의 전원합의체 판결 중 5 대 4(또는 4 대 5), 6 대 3(또는 3 대 6)으로 결정된 사건이 각각 48건(약 7.2%), 54건(약 8.0%)이었다. 헌재 구성이 한두 명만 진보 또는 보수 방향으로 갔어도 결정이 바뀌었을 사건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헌재의 대표성이 중요한 이유다.

이제 2023년 3월 이선애 재판관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헌재의 인적 구성이 바뀔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헌재의 대표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관심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헌재의 중요한 결정에 여론이 상당한 영향을 미쳐온 것으로 보인다. 2004년 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 기각, 2013년 상여금 포함 통상임금 결정,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2016년 국회선진화법 무효 각하, 2016년 불법 청탁금지법 합헌 결정 등이 그랬다. 헌재의 결정은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고 포퓰리즘에 영합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성숙한 시민의식만이 헌법재판소의 대표성을 담보할 수 있다.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