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30년 전 중국 톈안먼 사태를 상기했을 듯하다. 1989년 6월 4일 오전 4시 인민해방군은 탱크를 동원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당시 시위대의 학생대표 중 한 명이었던 차이링(柴玲)은 “학생들은 지쳐 천막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인민해방군이 탱크로 짓밟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국 방송사들은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도 모른다. 지난해 비밀 해제된 영국의 한 외교기밀문서는 총에 맞거나 탱크에 깔려 죽은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위의 운명은 종종 탱크 앞에서 갈린다. 1991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 탱크 위에 올라가 공산당 쿠데타가 무효임을 선언하자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톈안먼 사태가 남긴 사진 중 하나가 탱크를 가로막고 선 탱크맨(Tank man)의 모습이다. 사진은 어둠 속의 ‘성공적인’ 진압 다음 날인 6월 5일 낮에 찍혔고 그는 다행히 탱크에 깔리지 않았다. 2017년 대만 중양(中央)통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중국에서 이름을 숨기고 생존해 있다. 그러나 그의 생사와는 관련 없이 사진은 탱크에 짓밟힌 민주화 시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베네수엘라 사태를 탱크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톈안먼 사태에 비교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아직은 그런 지경까지 가지 않았다고 본다. 다만 올 초 야당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과도정부를 선언함으로써 고조되기 시작한 마두로 정권과 반정부 시위대의 갈등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시민을 향해 돌진하는 장갑차가 더 큰 비극의 전조가 아니었으면 한다. 군대는 모름지기 국민의 군대여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