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크라프트베르크’의 차디찬 공연(왼쪽 사진)과 가수 권인하의 뜨끈한 열창. 라이브네이션코리아 제공·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임희윤 기자
근로자의 날 오후, 방송국 복도를 지나다 대단히 힘든 목소리를 들었다. 남들 다 쉰다는 이날에 누구의 절창일까.
“진짜 조금 내 십분의 일만이라도∼∼!!”
#1. 권인하는 사실상 ‘원 히트 원더’다. 단 하나의 히트곡만 남긴 가수. 1989년 ‘비 오는 날 수채화’. 그나마 강인원, 고 김현식과 함께 부른 트리오 곡이었으니 심통을 부리자면 ‘3분의 1 히트 원더’인 셈이다.
그가 지금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유튜브 스타다. 3월에 만났을 때만 해도 18만 명이던 유튜브 ‘권인하’ 채널 구독자 수가 결국 며칠 전 20만 명을 넘었다. 국내 남자 솔로 가수로서는 톱이다.
‘권스타’의 비결은 목숨 건 열창이다. 가히 파스타 재료(요즘 노래)로 옛날식 된장찌개를 끓여낸다. 시대 역행이다. 요즘 10, 20대가 열광하는 가수 중엔 ‘음색 깡패’가 많다. 제약 광고에서 아이유의 ‘아프지 마세요’ 속삭임처럼,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가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 한 “공기 반 소리 반” 조언처럼 힘 빼고 노래하는 게 대세다.
#2. 힘을 뺀 것으로 치면 ‘크라프트베르크’가 모범이었다. 아이유나 박진영과는 조금 다른 식이긴 하지만. 지난달 26일 두 번째 내한한 전자음악 그룹. 1970년 서독의 뒤셀도르프에서 결성했다.
공연장에서 네 명의 멤버는 T자로 보이는 책상 하나씩을 두고 선 채로 손을 미묘하게 움직였다. 세계적인 EDM DJ들이 무대에서 미리 준비한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를 꽂아두고 뭔가 하는 척만 한다는 혐의를 받곤 했는데 그와 흡사했다. 다만 3차원(3D) 안경을 끼고 보는 입체 영상만이 열심히 일했다.
#3. 근로자의 날 오후, 권 씨는 스튜디오를 윤종신의 ‘좋니’로 거의 ‘씹어 먹고’ 있었다. 그 휑한 공간의 모든 공기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가 연소해 버렸다. 그 피스톤 기관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폭발해 뿜어져 나왔다. 안 좋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유튜브 영상에 누군가가 ‘어떤 여자냐… 얼른 나와서 사과드려라’라는 댓글을 쓰게 만든 바로 그 ‘천둥 호랑이’ 창법이다.
돌아보니 옛 노래는 자주 우직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썼다 지우는 손편지 같았다. 전인권이 ‘제발 숨, 막, 혀…’(들국화 ‘제발’)라고 열창할 때, 그것은 심이 나갈 정도로 꾹꾹 눌러쓴 펜글씨 같았던 것이다.
요즘 노래는 자주 카카오톡 메시지 같다. 실시간, 무제한이어서 가능한 툭툭 던지는 단문, ‘아니면 말고’의 반쯤 농담들. 옛 감성을 되살려 요즘 인기를 얻은 밴드 ‘잔나비’의 발라드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마저도 보컬 최정훈이 말했듯 전인권이 아니라 조덕배를 연상시키는, 툭툭 치고 나가는 가창이 감성 포인트다. 요즘은 랩도 그렇다. 4박자를 정확히 리듬으로 찍는 ‘붐뱁(Boom bap)’이나 한 자 한 자 성나 발음하는 ‘하드코어’보다는 웅얼대는 ‘멈블(Mumble)’이나 흘려버리는 ‘이모(emo) 랩’이 인기를 얻는다.
#5. 어쨌든 근로자의 날에 예술 노동에 대해 생각해봤다. 기계적 쿨함이든, 감성적 흘려버림이든, 목숨 건 절창이든 예술 노동에 귀천은 없다. 모두 다 고귀하다. 그것은 산업화와 기계적 시스템의 재촉 아래 하루하루 노동으로 숨가빠하는 현대인들에게 숨통을 틔워주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한 곡이라도 더 듣자. 그러기 위해 오늘도 노동한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