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운동이 일어나기 전 중국인들은 일본인들을 ‘구이쯔(鬼子·귀신)’라고 부를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주눅 들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을 동정하면서도 부패와 무능 때문에 망했다며 무시하던 중국인들은 3·1운동을 보고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해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호의적이었던 것도 3·1운동의 영향이었다고 부산대 배경한 교수는 말했다. 후에 공산당 초대 총서기가 된 신문화운동의 기수 천두슈는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절실하며 민의에 의한, 무력에 의거하지 않는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라고 평가했다.
▷그렇게 깨어난 민중의 의지가 표출된 것은 5월 4일 베이징 톈안먼광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의 중국 내 이권을 일본에 넘긴 데 분노한 베이징대 학생을 주축으로 한 3000여 명의 시위대는 광장에서 시위를 벌인 뒤 ‘친일 매국노 3인방’ 중 한 명인 군벌정부의 교통총장 차오루린의 집으로 몰려갔다. 응접실에 걸린 ‘일본 천황’ 사진에 격분해 집을 불살랐고 군벌정부는 학생 32명을 체포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의 항일 및 반군벌정부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는 곧 30주년을 맞는 톈안먼 6·4시위를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광장에서 벌어진 시위는 5·4운동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도 있었으나 지금 중국에서 6·4는 금기어다. 경제성장으로 중산층이 두꺼워지고 ‘성장통’이 심화되면서 중국 당국의 정치적 경계심도 높아지고 있다. 5·4와 6·4의 성지였던 톈안먼광장도 ‘침묵의 봄’이다. 5·4운동의 주역들이 100년을 건너와 본다면 안타까워할 현실이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