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운동에… 中민족은 부끄러워” 잇달아 궐기 촉구 학계 “5·4운동 발생-진전에 영향” 한국선 조선독립과 연계 맞조명… “韓中 모두 양국 민중 연대에 주목”
1919년 중국 5·4운동이 일어난 가운데 베이징대 학생이 거리에서 시민에게 연설하는 모습. 동아일보DB
중국 5·4운동의 총사령관 격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일컬어지는 천두슈(陳獨秀·1879∼1942)는 시사 잡지 ‘매주평론(每周評論)’ 14호(1919년 3월 23일)에서 3·1운동에 대한 감상을 밝히며 중국인의 궐기를 이렇게 촉구했다.
3·1운동 당시 중국 유력 매체들이 한국인의 거족적 독립운동과 단호한 독립 의지를 상세히 보도했고, 이는 5·4운동 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학계는 분석한다. 강수옥 중국 연변대 교수는 논문 ‘근대 중국인의 한국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5·4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 79집)에서 이를 조명했다.
특히 중국인이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천두슈는 ‘매주평론’에 쓴 논설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에서 “조선민족운동의 광영을 통해 우리 중국 민족의 치욕을 다시 맛보았다.…일반 국민은 명료하고 정확한 의식적 활동을 한 적이 없다…중국인을 조선인과 비교하면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썼다. 1919년 4월 3일 ‘민국일보’도 ‘조선독립에 대한 동정(同情)에서 “본래 조선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만주에도 변고가 생긴다.…결국 조선의 독립은 배일(排日) 문제가 아니고, 생존 문제이다. 또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고, 동아시아 및 전 세계의 문제”라고 했다.
강 교수는 3·1운동이 중국 각계를 놀라게 해 5·4운동의 성숙, 발생, 진전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그는 3·1운동이 △중국인의 반제반봉건 투쟁의식의 새로운 각성을 촉진했고 △반제구국 운동의 모델이 됐으며 △피압박민족 해방의 조류가 도달했음을 깨닫게 했다고 봤다.
광복 직후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세계약소민족해방운동사에 자연히 빛나는 기록을 지었던 것”(1946년 2월 27일 ‘3·1운동의 회상’), “세계에서 비폭력주의의 원조”(1946년 3월 1일)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는 3·1운동이 5·4운동이라는 하나의 사건뿐 아니라 중국의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에 참조 대상이 되며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는 연구도 나왔다. 리궁중(李恭忠) 중국 난징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3·1운동은 중국 독립국가 개념 형성에 중요한 촉매였다”고 밝혔다.
역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5·4운동을 조선의 독립과 연결지어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3월 2일 1면 사설 ‘중국 5·4운동’에서 “기미년 우리 3·1운동에 곧이어 일어난 모든 민족운동 중에는 중국의 5·4운동도 그 하나”라며 “일본은…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며, 기타 모든 동아(東亞)에 있는 중국과 유사한 식민지국가의 독립을 조성하야”라고 썼다.
또 “중국 국민운동의 구체적 전개의 제1보를 지은 5·4운동이 일어난 것도…우리의 3·1운동이 있은 것도 모두 1919년이 생산한 역사적 장면”(1927년 12월 16일 칼럼)이라며 피압박민족 해방운동의 연계 차원에서 5·4운동에 주목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3·1운동과 5·4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는 양국 민중의 단결과 연대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측면에서 기억됐던 것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