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바이오·헬스케어 시장에서 ‘데이터 전쟁’이 한창이다.
애플은 최근 39개 병원에 ‘헬스 레코드(Apple Health Record)’를 연결해 의료데이터 공유가 가능한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는 의사와 환자, 병원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도와 의료기록 공유와 접근성을 높인 것이다.
구글도 모바일 건강 모니터링 스타트업인 ‘세노시스 헬스’를 인수하고 의료데이터를 활용한 원격진료 기술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구글은 바이오 자회사 칼리코(Calico)를 통해 인간 수명을 500세까지 연장시키는 장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고효율 의료서비스 제공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의료데이터의 디지털화’가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소재가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보건의료 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이 향후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과 접목되면서 세계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글로벌 공룡들이 거대 유통망과 빅데이터를 이용해 헬스케어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혁신적인 의료데이터 플랫폼으로 세계 석권을 꿈꾸는 스타트업이 있어 주목 받고 있다.
서울 강남에 본사를 둔 ㈜제티오(ZTO)가 그 주인공. 이 회사는 세계 최초로 개인 의료정보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해 해외에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나가는 퍼스트펭귄의 질주가 매섭다.
▼ 제티오 ‘의료 스마트 플랫폼’, 캄보디아서 꽃피운다 ▼
캄보디아·제티오 재단법인 관계자들이 네이버 데이터센터 ‘각’을 방문했다.
‘길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만들어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말처럼 세상은 도전과 혁신으로 없던 길이 뚫린다. 제티오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주저할 때 미지의 바다로 먼저 뛰어들었다. 2013년 설립된 제티오는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의료데이터 플랫폼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의료데이터는 기존 병원들에 디지털로 보관된 전자의무기록, 즉 EMR(Electronic Medical Record)와 의료영상(PACS)을 보관할 수 있는 시스템에 수집, 저장, 판독을 넘어 실시간 원격의료 진료까지 가능한 기술이다.
지난 10년간 글로벌 국가에서 의료정보의 통합을 시도해 왔지만 다양한 이견과 걸림돌에 부딪혀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중앙집중식 의료데이터 시스템 간의 상호 연동은 보안성과 관리 및 고비용의 운영 측면에서도 한계와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티오가 도전하는 새로운 영역은 환자들이 스스로 의료기관이 제공하는 다양한 인증된 데이터를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어 필요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POR(Patinet-Owned Data Repository)의 개념을 충족시키고 진정한 환자 중심의 의료를 실현시키는 것이 사업모델이다.
‘의료데이터 플랫폼’이 도입되면 개인 건강진단 결과와 진료 기록 등의 의료정보를 병원끼리 공유할 수 있게 돼 병원을 옮길 때마다 발생하는 불필요한 중복 검사를 줄일 수 있다. 또 기존에 다니는 병원에서 따로 치료·처방전을 소지하지 않아도 진료가 가능한 것은 물론 타 지역 병원에서도 응급 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빠르게 확보해 필요한 처치가 적절하게 이뤄질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환자의 편익과 서비스 제고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며, 장기적으로는 개인의 평생 의료정보를 빅데이터로 구축하고 분석해 효과적인 치료법 개발과 불필요한 의료비를 절감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티오 의료데이터 플랫폼’이 상용화된 미래를 가정해 보자. 개인은 병원으로부터 자신의 의료정보를 전자문서 형태로 제공받고, 이를 휴대용 저장장치에 압축 및 암호화한 상태로 저장한다. 의료진은 제티오 플랫폼에 저장된 환자의 의료데이터를 바탕으로 불필요한 검사를 피할 수 있다. 환자는 돈과 시간을 아끼고, 의사는 진료 능률을 높일 수 있게 된다. 특히 의료데이터 플랫폼을 이용하는 환자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자신의 진료기록을 활용할 수도 있다. 전 세계 어느 의료기관에 가더라도 응급정보 등 자신의 의무기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건강을 위한 각종 비즈니스 모델도 만들 수 있다. 보건의료 정책 수립을 위한 다양한 데이터 분석도 가능해지고 기존에는 없던 헬스케어 서비스도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일종의 의료산업 인프라이며, 의료데이터 플랫폼인 것이다. 개인건강정보관리(PHR) 분석 결과를 전 세계 병원은 물론 제약사, 의료기기 회사 등 헬스케어 관련 기업에 전달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의료데이터 플랫폼의 최종 목표다.
해외에서 발견한 성장 동력
제티오는 최근 캄보디아 선진의료 서비스 인프라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올해 2월 캄보디아 정부와 글로벌 의료 스마트 플랫폼 구축 공동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7월에는 현지 법인도 설립했다. 의료데이터 플랫폼으로 글로벌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반도체 기술력과 의료기술이 집약된 새로운 메디컬 플랫폼은 캄보디아의 잠재력과 맞물려 성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제티오는 대기업도 하기 힘든 일을 캄보디아를 시작으로 동남아 주변국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 아랍 걸프(GCC) 지역 6개국(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쿠웨이트)과 메디컬IT 솔루션에 관한 업무 협약도 체결했다.
의료 후진국에는 선진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의료 선진국에는 개인의료 플랫폼 시대를 열어줌으로써 ‘100세 시대’의 건강한 생활을 돕는다는 것이 거시적인 목표다.
특히 캄보디아가 한국의 신(新)남방정책 추진에서 핵심적인 협력 파트너로 떠오르면서 제티오의 성장 잠재력도 주목받고 있다. 연평균 7% 이상씩 경제가 성장 중인 캄보디아 정부가 의료 인프라 개선에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제티오의 해외사업은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맞물려 탄력을 받고 있다. 정부는 캄보디아에 향후 5년간 7억 달러 규모의 차관(유상 원조)을 지원하기로 했다. 3억5000만 달러의 차관 약정을 맺었던 2016∼2019년 때보다 2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지난달 캄보디아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프놈펜에서 훈센 총리와 한-캄보디아 정상회담을 갖고 발표한 내용이다. 양국 정부 장관들은 국립의과대 부속병원 건립사업과 투자 증진 협력 등의 내용을 담은 4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중 국립의과대 부속병원 건립사업 차관공여계약 MOU는 캄보디아 국립의과대 내 부속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장비 및 시스템 구축 등 6700만 달러 이내의 차관 지원을 담고 있다.
제티오는 캄보디아 정부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현지 관계자들과 공동으로 ‘캄보디아 헬스케어 컴퍼니’(가칭)를 조만간 설립할 예정이다. 한국의 우수한 메디컬 IT 솔루션을 우선 캄보디아에 전파하고 나아가 주변 동남아 국가들에도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개인정보 보호에 가로막힌 스마트헬스
제티오의 의료데이터 플랫폼과 같은 차세대 바이오헬스 융·복합모델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보건의료 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과 서비스가 개발돼도 국내에서는 사업화가 쉽지 않은 환경이다. 의료데이터의 활용을 두고 ‘개인정보보호법’ 침해 논란이 뜨겁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산업은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온갖 규제에 묶여서 ‘있어도 못 쓰는’ 토종 헬스케어 기술이 수두룩하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대표적 규제 중 하나가 원격진료다. 원격진료는 의사와 환자 간 거리의 장벽을 없애는 것은 물론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용을 낮추고 연관 산업의 규모도 키울 수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규제로 인해 의사 간 외에는 원격진료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세계 원격의료 시장은 2015년 181억 달러에서 연평균 14% 성장률을 보이며 2021년 412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원격의료 활성화에 시동을 걸고 있는 일본의 경우 원격의료 시장이 2015년 122억6900만 엔에서 올해 199억600만 엔까지 커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보기술(IT) 선진국 가운데 원격진료를 유일하게 금지하고 있다. 일본은 2015년 원격의료를 전면 시행했고, 독일도 지난해 원격의료 금지를 폐지했다. 미국은 전체 진료 6건 중 1건이 원격으로 이뤄지고 있다. 신산업 도입 속도가 느리다고 평가받는 프랑스도 지난해 9월 원격진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2000년 처음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시작한 이후 의사단체의 반발과 시민단체의 의료영리화 논란 등에 가로막혀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 2016년 의사와 환자 간 원격의료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발의된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시장에 돌아가고 있다.
제티오 이동욱 대표는 “의료데이터 플랫폼과 같은 첨단 헬스케어 서비스가 열매를 맺고 성장하려면 혁신의 토양이 필요하다”면서 “지금이라도 그 토양을 만들지 않으면 의료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식 기자 m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