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은 이탈리아 밀라노 관광의 필수 코스입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모나리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습니다. 두 그림 모두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사진)의 작품입니다.
다빈치는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 정치학, 인체 해부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오늘날의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낙하산, 대포, 전차 등을 스케치했습니다. 다빈치의 위대한 발자취는 식물학과 지질학, 건축학, 물리학, 화학, 음악 분야에서도 발견됩니다.
다빈치 전기를 쓴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다빈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자연이 하늘의 기운을 퍼붓듯 한 사람에게 엄청난 재능이 내리는 것을 본다. 이처럼 감당 못 할 초자연적인 은총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재능을 고루 갖게 되는 일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이 내는 것들은 신이 손을 내밀어 지은 것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다빈치가 그런 사람이다.”
5월 2일, 다빈치가 말년을 보낸 프랑스 중부 클로뤼세 성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만나 다빈치를 기리며 우의를 다졌습니다. 그 전까지 양국은 갈등 상태였습니다. 2월 초 루이지 디마이오 이탈리아 부총리가 ‘노란 조끼’ 시위대를 지지하면서 외교적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난민 구조선의 입항을 거부한 이탈리아 정부를 비판해 양국 간 갈등을 키웠습니다. 그럼에도 다빈치를 매개로 양국이 화해가 시작된 겁니다.
나아가 다빈치는 융합형 인재의 전형입니다. 생전에 다빈치를 무척 존경했던 스티브 잡스는 기술과 인문학, 예술의 교차점에서 창의성이 나온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한국의 2015년 개정 교육과정 역시 융합 인재 양성을 목표로 전통적인 문·이과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세종시와 인천 송도에 과학예술영재학교를 세운 것도 다빈치형 인재를 기르기 위함입니다.
사실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왼손잡이에다 채식주의자, 그리고 동성애자였습니다. 아웃사이더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제대로 된 학교를 다닌 적도 없지만 치열한 자기주도 학습을 실천했습니다. 강한 지적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탐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는 독서를 즐겼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붙잡기 위해 평생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그가 남긴 7200쪽이 넘는 분량의 노트는 메모 습관의 결정체입니다. 국경의 장벽을 넘어 갈등을 해소하고 학문의 경계를 넘어 시대적 난제를 해결하는 혜안을 다빈치 정신에서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