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밤의 외로운 불빛은 단지 시인이 낭만을 노래하는 소재나 귀선(歸船)의 피로를 풀어주는 표지만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임을 실감한 때가 있다. 1996년 동해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을 취재할 때 등명낙가사라는 절의 주지로부터 들은 얘기다. “한밤중에 절로 돌아가다가 잠수함이 좌초한 곳에 인접한 해안 절벽에서 바다 쪽으로 전조등을 비춰주는 자동차를 봤다.” 그의 말이 맞다면 좌초한 잠수함의 무장간첩들은 고정간첩이 켜준 전조등을 등대 삼아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산으로 도망친 것이 된다.
▷서해 대(大)연평도에는 조기잡이 어선의 바닷길을 비추는 등대가 1960년에 세워졌다. 북한 간첩 침투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1974년 소등됐다. 이후에도 바다에 안개가 많이 낄 때 이곳에서 소리 신호는 보냈는데 그마저도 1987년 중단됐다. 정부는 17일 45년 만에 연평도 등대의 불을 다시 켜기로 했다. 이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조성하고 향후 남쪽의 인천항과 북쪽의 해주·남포항을 잇는 해로가 개설될 때에 대비한 것이라고 한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같은 항법장치의 발전으로 등대는 점차 없어지는 추세다. 그래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면 항해에 나쁠 건 없다. 다만 군사적 부담을 감수하고 등대를 가동할 필요가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북한 해안 방사포는 등대 불빛을 보고 쏘는 것이 아니라 좌표를 찍어 쏘는 것이어서 달라질 게 없지만 공기부양정 등이 야간 침투할 경우 등대 불빛은 유용한 지표가 된다. 주민에게 당장 등대가 시급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평화가 정착됐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군사적 보완책을 강구한 뒤에 점등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