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佛 엘리트 교육 시스템 부유층에 반감 ‘노란조끼’ 함성에… ENA 출신 마크롱 폐지 승부수 “인재 발굴” 드골이 1945년 만들어… ‘그들만의 리그’로 공공 분야 장악 대통령 4명-총리 8명이나 배출… “행정-경제 요직 대물림” 비판속 “대체할 교육기관 없어” 목소리… 여론조사는 54%가 폐지 반대
프랑스 파리 6구에 있는 국립행정학교(ENA) 건물 입구. 학교 본관은 1991년 스트라스부르로 이전했고 교육 과정 일부만 파리에서 운영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파리=동정민 특파원
ENA 출신은 당을 뛰어넘어 ‘에나크(Enaques·ENA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동문’이라는 뜻)’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정치판을 장악하고 있다. 프랑스 방송 BFM TV에 따르면 2011년 ENA 7년 선배인 필리프 총리를 저녁식사에서 처음 만난 마크롱 대통령은 그와 급격히 가까워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총리 임명 다음 날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 내각 총괄 책임자, 국무총리 내각 총괄 책임자 등을 발표했는데 모두 ENA 출신이었다.
ENA의 입학생은 불과 80명. 1945년 설립 이후 6500명을 배출했다. 6500명 가운데 4명은 대통령, 8명은 총리에 올랐다. 그런데 지난주 마크롱 대통령과 필리프 총리가 ENA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가진 노란조끼 시위대를 잠재우기 위해 ‘ENA 폐지’라는 카드를 꺼냈다. ENA 폐지와 관련된 논란에는 프랑스 사회와 교육 시스템의 명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프랑스 교육이 모두 평등교육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엘리트 교육을 받으려면 전혀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 중심에는 ‘대학 위의 대학’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Grandes ´Ecoles)’이 있다. 고교 졸업 후 그랑제콜에 가려면 2년 과정의 예비학교인 ‘프레파’를 거쳐야 한다. 파리 부촌인 16구에 사는 한 교민 초등학생은 “그랑제콜에 들어가려면 중학교 입시부터 치열하다”고 기자에게 귀띔했다. 올해 9월 중학교 입학을 앞둔 그는 1년 전인 지난해 9월 유명 사립중학교 원서를 받으려고 새벽부터 긴 줄을 서야 했다. 학생은 물론이고 학부모도 면접을 봤다. 유명 사립고도 시험을 통과해야 들어가는데 프랑스 일간지들은 매년 전국 고교 순위를 매겨 발표한다.
일간 르파리지앵은 3일 프레파 과정 학생의 높은 스트레스를 특집 기사로 내보냈다. 전국 227개 그랑제콜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은 전체 고교생의 4, 5% 정도. 프레파 과정에 참여하는 학생은 2000년 7만300명에서 2016년 8만6500명으로 늘었다. 치열한 경쟁과 불안감 때문에 지난해 11월과 올해 3월 명문고 출신 프레파 학생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트라스부르의 EM 비즈니스 스쿨 프레파 학생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5%가 “이 경쟁은 매우 비인간적인 마라톤과 같다”고 응답했다.
그 대신 그랑제콜에 들어가는 순간 취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해 그랑제콜 콘퍼런스 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그랑제콜 졸업생 89.4%가 졸업 6개월 이내에 취직을 했다. 그랑제콜은 학교별로 행정 공학 경영 등 전문 분야가 나뉘는데 연구보다는 실무 중심이다. 이 때문에 세계 대학 순위에서는 명성만큼 순위가 높지 않다. 이런 그랑제콜의 최정점에는 ENA가 존재한다. ENA 학생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20대 중후반인데, 다른 그랑제콜을 다니다 입학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2009년 한 조사에 따르면 ENA 학생의 절반이 프랑스 정치 명문 그랑제콜인 시앙스포 출신이었다.
○ 마크롱은 ENA 출신이라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ENA 출신의 도움으로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올랐다. ENA 출신인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이 그를 발탁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올랑드를 도왔고 당선 이후 대통령 경제보좌관으로 엘리제궁에 들어갔다. 2014년 무명에 가까운 37세의 마크롱이 경제산업장관에 임명됐을 때도 르몽드 등 대부분 프랑스 언론은 ENA 학맥이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ENA에서 졸업 성적이 15등 이내에 드는 우수 졸업생들은 경제부, 감사원, 행정위원회에 배치돼 이들 부서는 ENA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ENA는 학비가 무료인 대신 졸업 이후 10년 동안 의무적으로 공직에서 근무해야 한다. 의무 근무 연수를 채우지 못하면 학비를 반납해야 하는데, 최근에는 학비를 반납하고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례도 많다. 마크롱 대통령도 로스차일드은행에 들어갈 때 5만 유로의 학비를 반납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ENA 출신도 많다. 프랑스 정부가 상당한 비율의 지분을 가진 주요 기업에 ENA 출신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정부 지분이 많은 우체국그룹과 철도공사(SNCF)의 CEO는 모두 ENA 출신이다.
○ ENA를 향한 국민들의 애증
지난해 11월 유류세 인상으로 촉발된 노란조끼 시위는 부유층에 대한 반발 심리가 깔려 있다. 시위대는 ENA 출신으로 투자은행에서 근무했던 마크롱 대통령을 ‘부자 대통령’이라고 여기며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ENA가 계급 갈등의 상징으로 떠오른 이유는 입학생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이기 때문이다. 2015년 프랑스 CNEWS에 따르면 ENA 졸업생 72%가 고위 공직자와 기업 임원의 자녀였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노동자 가정 출신 ENA 재학생은 1985년 10%에서 2010년 6%로 더 떨어졌다.
반면 마크롱 대통령 측근 중에는 ENA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ENA 출신의 브뤼노 르메르 재정장관은 2017년 대선 경선 출마 당시 ENA 폐지를 공약했다. 당시 르메르는 “ENA 출신이라는 이유로 장관을 지낸 이들이 전문적인 교육이나 경험도 없이 국영 기업에 낙하산으로 내려간다”며 “기업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비난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마크롱 대통령은 미국, 영국과 달리 프랑스에는 ENA를 대체할 만한 교육기관이 없어 고민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엘리트 교육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ENA 폐지는 시위대에 무릎을 꿇은 포퓰리즘 정책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