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레이먼드 게이타 지음·변진경 옮김/219쪽·1만4000원·돌베개
호주의 광대한 평원이 펼쳐지는 에릭 바나 주연의 2007년 영화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 ⓒFootprint Flims
그러나 그것은 이 책이 펼쳐내는 드라마의 겉모습일 뿐이다. 이민 노동자로 사회의 하층에 있지만 정신의 존엄을 잃지 않는 꿋꿋한 사람들이 있고, 포기하지 않는 헌신과 애정이 있으며, 훗날 철학자로 자라나는 저자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 있다. 책장을 덮은 뒤에는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의 윤곽을 뚜렷이 그려내는 빛, 여름 풀잎과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색을 띤 흙길, 죽은 한 그루 레드검 나무’로 표상되는 호주 평원의 풍경이 한동안 눈앞에 어른거린다.
루마니아계 유고인으로 독일에 징용된 저자의 아버지 로물루스. 독일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전후 유럽의 피폐와 아내의 천식을 피하고자 바다를 건넌다. 고향 친구를 찾다가 단치우 형제와 밀접한 사이가 된다. 얼마 뒤 아내는 우울증에 빠지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치닫기 시작하는데….
그래도 저자가 기억하는 그 시절에는 인간과, 심지어 동물의 체온까지 넘쳐난다. 집안의 질서를 꿰고 있는 꾀쟁이 앵무새 잭, 그리고 개와 고양이들이 있고, 주말 오후 티타임에 초대해 준 노부인 자매와 그밖의 푸근한 이웃들이 있었다. 책벌레였던 호라 아저씨는 슈바이처와 의학자 제멜바이스, 철학자 러셀의 고귀한 이상을 이 소년에게 각인해 준다.
1946년 독일에서 호주로 떠나기 직전의 로물루스 게이타(왼쪽 사진)와 10년 뒤 열 살 무렵의 아들 레이먼드. ⓒRaimond Gaita
책을 읽으며 ‘개 같은 내 인생’ ‘길버트 그레이프’ 같은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다. 주인공 각자 어리석음과 약점이 있지만 따뜻함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읽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책은 2007년 에릭 바나가 주연한 리처드 록스버러 감독의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로 영화화됐다.
원서는 ‘Romulus, My Father’라는 제목으로 1998년 출간돼 그해 호주 언론이 선정한 ‘올해의 책’을 휩쓸었다. 우리말 제목은 저자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읽은 추도사에서 책이 시작된 점에 착안한 것이다. 저자는 멜버른대 인문학부 교수이자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명예교수이며 영어권 도덕철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