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유언보다 강한 ‘유류분’ 놓고 청구소송 10년새 4.6배로
A 씨는 법정에서 친오빠로부터 이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1남 3녀 중 장녀인 A 씨는 201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빠와 평범한 남매지간으로 지냈다. 지금은 원고와 피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가 됐다. 아버지는 아들 앞으로 상가와 주택 등 전 재산을 유산으로 남겼다. A 씨는 오빠를 상대로 1억여 원을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당시 아버지가 오빠에게 매달 준 생활비 내역을 A 씨가 들추자 오빠는 A 씨의 결혼 자금이 상속재산이라며 분할을 요구한 것이다. A 씨는 2년간의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4500여 만 원을 손에 넣었다.
B 씨의 아버지는 2012년 초여름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병원에 실려 갔다가 입원 9일 뒤 숨졌다. B 씨는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다 아버지가 재혼한 새어머니와 그의 딸에게 숨지기 직전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을 넘겨준 것을 알게 됐다. 입원 이틀 뒤 등기가 이전됐고, 증여계약서에는 이른바 ‘막도장’이 찍혀 있었다. 새어머니 측은 “장기간 망인을 간호했다”고 주장했지만 소송 끝에 B 씨가 유산을 가져갔다.
○ 10년 동안 4.6배로 늘어… 1억 원 이하가 64%
유류분은 유언을 제한하는 제도다. 유언자의 의사만으로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경우 남은 가족의 생활 안정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상속인이 법률상 반드시 취득하도록 보장되어 있는 몫이다. 민법 1112조는 유류분 비율을 직계비속(자녀들)과 배우자가 법정상속분의 절반, 직계존속(부모)과 형제자매는 법정상속분의 3분의 1로 정하고 있다.
최소한의 유류분을 받지 못한 상속인은 유산을 더 많이 가져간 가족들을 상대로 자신 몫의 유류분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은 2008년 295건에서 지난해 1371건으로 10년 사이 약 4.6배로 급증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평균 약 17%씩 매년 소송 건수가 늘어난 것이다. 2012년 처음으로 500건을 넘어섰고, 2016년 이후에는 1000건을 초과했다.
최근엔 소액으로 법정 다툼을 하는 사례가 많다. 지난해 1000만 원 이하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한 사건은 148건으로 전체 사건의 10%를 차지했다. 1억 원 이하의 돈을 요구한 소송은 전체의 64%였다. 10억 원을 초과한 사건은 지난해의 경우 28건으로 전체 사건의 2% 정도에 불과하다. 부모가 수십 년간 매달 5만∼10만 원씩 줬던 용돈을 끄집어내거나 부모의 계좌이체 내역을 모두 가져와 사전 증여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례까지 있다. 10원이라도 더 받으려고 피붙이 간에 양보 없이 치열하게 다투는 것이다. 가사전문 사건을 주로 맡는 최동훈 변호사(41·변호사시험 2회)는 “상속 분쟁이 나중에는 감정싸움으로 번져 누가 효자로 인정받느냐의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 불효자 몫도 인정… ‘사회 환원’ 약속도 막혀
불효자에게도 유류분이 인정될까. 민법은 효자, 불효자를 가리지 않고 유류분을 보장한다. 극단적인 경우 불효자의 유류분 반환 청구권을 허용하지 않은 예외적인 판례가 있다. 치매 노모를 모시고 살았던 C 씨 사건이다. C 씨는 자식들 얼굴도 몰라 볼 정도로 심한 노인성 치매를 앓던 어머니를 8년여간 극진히 모셨다. 매일같이 어머니를 손수레에 태워 병원에도 모시고 갔다. 다른 형제들은 한 번도 투병 중인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았다. 형제들은 10년 전 어머니가 C 씨에게 준 부동산 지분의 분배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부모가 사망한 뒤 유산을 서로 더 갖겠다며 벌이는 상속 관련 소송의 형태도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모가 장남에게 몰아 준 유산을 찾기 위해 딸들이 제기한 소송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엔 이혼과 재혼 가정이 늘면서 전처와 후처 자식 간의 분쟁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김수진 가사전문 변호사(52·사법연수원 24기)는 “재혼 가정이 많아진 만큼 이복형제 간의 상속 분쟁 소송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유언이 상속 분쟁 불씨 되기도
‘A아파트는 아들에게 물려준다. B은행에 예치돼 있는 금융자산 중 50억 원은 장학재단에 기부한다. 2008년 5월 2일. 이○○ 친서’
이모 씨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유언장을 썼다. 3년 뒤에 숨졌는데, 생전에 자녀들이 불만을 갖더라도 가족 간에 소송을 하는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꿈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 씨의 예측은 빗나갔다. 이 씨의 유언이 오히려 상속 분쟁의 불씨가 됐다. 이 씨의 자녀들은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이 씨의 유언을 무효라고 판결했다.
○ “유언 더 중시하도록 법 개정” 여론 커져
자녀들이 성별과 관계없이 동등한 상속을 받게 된 건 40년 전부터다. 1960년 민법이 시행되기 전엔 장남만이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민법이 생기고 나서도 장남과 장남이 아닌 아들, 출가하지 않은 딸, 출가한 딸이 모두 다른 비율로 유산을 나눠 가졌다. 수차례 개정을 거친 뒤 1979년에서야 남녀 균등하게 상속분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유류분 규정까지 생기면서 유언과 관계없이 법적으로 일정한 비율의 상속이 가능해졌다. 유류분 제도는 상속 재산 처분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인정하면 일부 상속인의 생활 보장이 침해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도입됐다.
최근 들어선 상속분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유류분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피상속인의 사망이 늦어지면서 상속인들이 대부분 경제적 능력을 갖출 정도로 연령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 한국과 같은 유류분 제도가 있다. 하지만 미성년자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유류분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어 일률적인 유류분을 보장하는 한국과는 차이가 있다. 김상용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류분 제도의 정당성이나 필요성이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망인의 유언을 좀 더 존중하는 쪽으로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예지 기자 ye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