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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신연수]미분양 주워 담는 ‘줍줍’

입력 | 2019-05-11 03:00:00


서울에서 강남 못지않게 교육환경이 좋고 인기가 높은 곳이 목동이다. 하지만 1985년 처음 아파트를 분양할 때는 미분양이 태반이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안양천이 넘쳐나는 침수지역에 제방을 쌓고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섰지만 미분양은 몇 년 동안이나 해소되지 않았다. 그랬던 서울 서부의 벽지가 중산층의 고급 주거지로 변모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똘똘한’ 미분양 아파트를 사는 것은 예전부터 부동산 고수들이 전하는 투자의 한 기법이었다. 개발연대에는 건설사 임직원들 가운데 미분양 아파트를 억지로 떠안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사람도 많다. ‘자서(自署) 분양’이라고 해서 건설사들은 미분양분을 임직원들이 사게 하고 대출 이자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엔 이익은 못 보고 빚에 몰리는 등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아서 2013년 정부가 자서 분양 방지책을 만들기도 했다.

▷아파트개발이 본격화된 1970년대부터 부동산 투기와 이를 잡으려는 정부의 전쟁은 반복됐다. 1970년대에는 ‘복부인’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1980년대에는 군 장성 부인들을 지칭하는 ‘빨간 빽바지’가 투기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똘똘한 한 채’ ‘마용성’ 같은 용어들이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 등장한 말이 ‘줍줍’이다.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에 당첨되고도 계약을 하지 않는 미계약 물량이 많아지자 이런 물량들을 ‘줍고 또 줍는다’는 뜻이란다.

▷정부는 지난해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을 돕겠다며 청약제도를 대대적으로 손봤다. 그러나 분양가 9억 원 이상 아파트의 중도금 대출이 막히면서 당첨되고도 돈이 부족하거나 자격 미달로 계약을 못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청약에 당첨되려면 무주택 기간이니 자녀 수니 조건이 많지만 미분양분은 ‘무(無)순위 청약’이라고 해서 아무 조건 없이 살 수 있다. 3월 서울 서대문구에서 분양된 한 아파트는 419채 가운데 171채(41%)가 무순위였을 정도로 무순위가 급증했다.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대출이 막히면서 되레 수억 원의 현금을 바로 동원할 수 있는 현금 부자들이 아파트를 주워 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국토교통부는 20일부터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 아파트를 분양할 때 예비 당첨자 수를 현행 80%에서 500%로 크게 늘리기로 했다. 최초 당첨자가 포기를 해도 무순위가 아니라 실수요자인 1, 2순위 신청자에게 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예비 당첨자를 늘리는 것도 좋지만 실수요자에게는 대출 규제를 푸는 등 좀 더 본질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