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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광영]긴급한 현장일수록 ‘非긴급’으로 위장한다

입력 | 2019-05-14 03:00:00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제가 112 신고했는데 별일 아니에요. 돌아가셔도 돼요.”

지난해 8월 한 사내가 집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채 말했다. 전남 여수경찰서 최모 경위는 “친구가 술에 취해 때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참이었다. 흔한 주취폭행 신고였다. 어느새 문은 닫히고 있었다. 최 경위가 문을 잡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합니다.”

사내는 목소리를 높였다. “신고자가 별일 아니라고 하잖아. 집에 아무도 없다고.” 그때 집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함께 출동한 동료가 신고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사내는 순간 뒤를 돌아봤다. 최 경위가 내부를 힐끔 보니 바닥에 사람의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최 경위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피범벅이 된 채 의식을 잃은 한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났다. 그는 응급수술 후 목숨을 건졌다.

2월 10일 새벽 경남 창원 마산동부경찰서 문모 순경은 “언니가 어딘가에 갇혀 성폭행을 당한 것 같다”는 신고를 받았다. 휴대전화 위치추적 결과 언니는 마산의 한 시장 주변 150m 반경에 있었다. 문 순경은 불이 켜진 집들을 찾아가 현관문에 귀를 대봤다. 2층 원룸 문에 귀를 대보려는데 문손잡이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몇 번의 움직임 후 이내 안에서 불이 꺼졌다.

수상했지만 그것만으로 수색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살려주….” 소리는 들릴 듯 말 듯했다. “경찰입니다. 문 좀 열어 보시죠.”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중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새벽에. 잠자는 시민을 막 깨워도 되는 겁니까.” 문 순경은 멈칫했다. 잘못 짚은 거라면 민원감이다. 그래도 감(感)을 믿기로 했다. “안 열면 강제 개방합니다.” 얼마 뒤 도어록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 순경은 문을 열어젖혔다. 한 여성이 손을 벌벌 떨며 털썩 주저앉았다.

3월 26일 대구지법은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집에 들어온 경찰관에게 유리병을 던지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남성에게 1심에 이어 무죄를 선고했다. 경찰관은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자 열려 있던 문으로 진입했다가 공격을 당했다. 법원은 허락 없이 집에 들어간 경찰의 행위가 적법하지 않다고 봤다. 이미 범행을 저질렀거나, 당장 범행을 저지를 것처럼 위급하지는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상황에선 경찰을 폭행해도 공무집행방해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다.

긴급한 현장일수록 ‘비긴급’ 징후들로 위장돼 있는 경우가 많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 않으면 현관문 너머의 피해자를 지나치기 쉽다. 현장은 살아 움직이는데 고정된 잣대로 현장 대응을 평가하면 경찰관들은 소극적인 대응을 합리적 선택으로 여길 수 있다. 그들 역시 한 사람의 가장이자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진주 방화·살해범 안인득의 난동 신고를 8번이나 받고도 범행을 막지 못한 무심함, 이영학 살인사건 때 피해 여중생이 그의 집에 갔다는 걸 알고도 즉시 집에 가보지 않은 안이함은 학습된 무기력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법정에 선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돼야 하고 수사 받는 피의자는 방어권이 보장돼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루는 재판과 수사는 넘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한 번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경찰의 초동 대응은 모자라지 않는 게 중요하다. 위험한지 아닌지는 들어가 봐야 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