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요즘 디스커버리 채널 ‘이거 어떻게 만들래요?’라는 숲속 집짓기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의 집을 말하면 건축가가 그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숲속에 가서 나무를 보고 건축 구상을 한 뒤 최적화된 기술자를 부른다. 뚝딱뚝딱, 스윽스윽, 드르릉. 이런 소리들이 울려 퍼지는가 하면 어느새 나무 위에 마법처럼 작고 아름다운 집이 완성되어버린다. 건축주와 시공사 간의 분쟁이나 갈등은 없다.
“집 짓고 나면 다들 10년 늙는대. 암 걸려 죽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어. 시공사들이 돈 다 빼먹고 날아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단다. 돈도 생각보다 몇 배는 더 들고, 다 지어놓고 보면 처음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집이 나온대. 너 이제 진짜 큰일 났다. 우짤래?”
“한 마을에 양조장이 있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거야. 따뜻한 불씨를 가진 것과 같아. 한 잔의 술은 그냥 포도주가 아닌 거야. 그 마을 언덕땅의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포도가 자랐던 날들의 햇빛과 바람, 농부의 땀과 손길, 그에게 건넨 마을 사람들의 인사와 개 짖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어. 신기한 것은 와인이 익어갈수록 포도가 익어가던 때의 특징들이 더 깊어간다는 거지. 갑자기 조셉의 와이너리 냄새가 느껴진다. 가보고 싶다.”
조셉은 큰누나네 동네에 와이너리를 가진 레돔의 친구다. 지금쯤 마을을 둘러싼 포도밭은 구불구불한 연둣빛 선으로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곳은 포도와 함께 세월이 가는 와인 마을이다. 포도밭 언덕은 사계절 다른 색깔로 물들고 사계절 다른 냄새가 난다. 여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포도를 딴다. 우리의 품앗이와 같다. 갓 딴 포도를 트랙터에 싣고 가 발효탱크에 붓고 맨발로 짓이기는 날들이 몇 날이나 계속된다.
가을이면 포도밭 언덕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달리는 사람들은 발효탱크에서 은근하게 흘러나오는 술 익는 냄새에 코를 찡긋찡긋거린다. 조셉은 하루에도 몇 번씩 와인을 맛보느라 코가 빨갛게 되어 있다. 포도밭에 눈이 덮이는 겨울이면 발효 탱크 속 와인은 안정기에 접어들고 모두에게 가장 편안할 때다. 압력솥에 훈제 돼지 넓적다리를 푹 삶아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먹는 계절이다. 부드러운 훈제 돼지고기를 입에 넣은 뒤 알자스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 그 향기로움에 취해 겨울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
포도밭에 눈이 녹으면 사람들은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한다. 새로운 포도가 열릴 것이고 전년과는 또 다른 맛의 와인 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레돔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가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할 때라고 한다. 양털 귀마개를 하고 두꺼운 양말에 보온 장화를 신고 포도밭에 가면 종일 일해도 지겨운 줄 모른다. 싹둑싹둑 소리를 들으며, 이른 봄의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인생의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는 한때이다.
우리는 이제 막 땅과 함께 꿈꾸기 시작했다. 이 두근거리는 예고편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스릴러 영화의 마지막 편처럼 궁금하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