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인 공연 선보였던 극장, 경영난으로 내달 마지막 공연 “대학로의 상징적 공간 사라져” 극장 운영자인 배우 윤석화 “애증 생길만큼 운영 힘들어”
설치극장 정미소를 거쳐 간 작품들. 2008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닥터리빙스턴 역을 맡은 윤석화 씨(오른쪽)의 모습. 돌꽃컴퍼니 제공
서울 종로구 이화장길에 위치한 설치극장 정미소는 2002년 윤 씨와 건축가 장운규 씨의 손에 탄생했다. 이들은 목욕탕으로 쓰다 남겨진 3층짜리 폐건물을 예술 공간으로 바꿔보자는 데 뜻을 모아 건물을 사들였다. 극장 이름인 ‘정미소’는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개조된 건물은 소극장, 갤러리, 공연장 등 다양한 공간으로 쓰이며 실험적인 공연을 올리는 개성 있는 소극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극장 내부와 천장에는 17년간 극장을 거친 작품과 박정자, 손숙 씨 등 원로배우의 작품 포스터가 붙어 있다. 문화공간으로 숨쉬어 온 세월이 짙게 묻어난다. 192석 규모의 정미소는 다른 소극장과 달리 무대의 높이가 6m가 넘기 때문에 다채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작품들이 오를 수 있었다. 윤 씨가 월간지 ‘객석’ 발행인을 지낼 때 객석 사무실이 정미소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개인 자금을 투자해도 수익성 악화를 개선하지 못해 2013년 객석을 매각했다. 정미소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다.
2017년 연극 ‘14人(in)체홉’(오른쪽 사진)과 지난해 공연된 연극 ‘타클라마칸’. 맨씨어터·아트리버 제공
극장이 가진 상징성 때문에 연극계에서는 정미소의 폐관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한태숙 연출가의 ‘서안화차’, 박상현 연출가의 ‘자객열전’ 등 숱한 의미 있는 작품들이 설치극장 정미소를 거쳐 갔다”며 “독특한 아우라를 갖고 있던 극장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황승경 연극평론가는 “대학로 연극계의 상징적 공간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17년간 극장을 지킨 윤 씨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굉장히, 굉장히 어려웠다”며 “건물 매각 후에는 매입자가 연극에 엄청난 뜻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혹은 연극쟁이나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소극장이나 연극인을 위한 공간으로는 운영되지 않을 것 같다”며 웃었다. 겉으로는 유쾌한 그의 웃음 속에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듯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정미소로 대표되는 대학로 소극장은 연극인들에게 애증이 담긴 존재다. 윤 씨는 “오랜 시간 소극장을 운영해 본 사람은 ‘극장을 지금이라도 불태워 버리고 싶다’고 농담할 정도로 늘 애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시원섭섭한 감정을 담아 마지막 말을 했다.
“영원한 건 없어요. 그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