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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우경임]세계 육상 문화유산

입력 | 2019-05-15 03:00:00


국제육상연맹(IAAF)은 지난해 ‘세계 육상 문화유산(World Athletics Heritage)’을 만들어 올해부터 대상 선정을 시작했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육상의 놀라운 순간을 기념하자’는 뜻에서다. 육상의 역사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회, 인물, 장소, 작품이 대상이다. 10일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 대회가 세계 육상 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마라톤 대회로는 보스턴 마라톤과 아테네 마라톤에 이어 세 번째이다.

▷세계 육상 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는 달리 대상국의 신청 없이 IAAF가 독자적으로 선정한다. 세계 5대 마라톤 대회 중에서는 뉴욕 베를린 시카고 런던을 빼고 보스턴 대회만이 선정됐는데 1897년 이래 122년의 긴 역사를 지닌 보스턴 마라톤을 제외하고는 모두 1970년 이후 시작돼 역사가 길지 않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동아마라톤은 보스턴 다음으로 역사가 긴 대회다. 아테네 마라톤은 시작은 1972년이지만 고대 그리스 병사의 마라톤 원조 코스 42.195km를 되살렸다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동아마라톤은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등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만든 선수들을 배출했다. 1932, 33년 동아마라톤에서 입상한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써 일제 핍박 아래서 신음하던 온 겨레에 희망을 쐈다. 1940년 일제는 동아마라톤을 강제로 중단시켰고, 14년 만인 1954년 6·25전쟁이 끝나고야 재개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외국인이 우승한 건 1977년, 본격적인 국제대회로 거듭난 것은 1993년부터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8, 1999년에는 국제대회로 치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국내 마스터스 참가자가 1만 명을 처음 돌파해 마라톤의 저변이 확대됐다. 금융위기가 휩쓸고 간 2009년에는 ‘39세 봉달이’ 이봉주 선수가 동아마라톤을 은퇴 무대로 선택해 40번째 풀코스를 완주했다. 1995년과 2007년 두 차례 동아마라톤을 제패했던 노장의 마지막 도전을 국민들은 뜨겁게 응원했고, 쓰러질 듯 말듯이 힘겹게 결승선을 통과한 이 선수는 “국민 여러분, 감사해유”라며 화답했다. “마지막인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한껏 용기를 얻었고 정말 그 위기를 헤쳐 나왔다. 88년 역사의 동아마라톤, 대한민국과 함께 뛰고, 넘어지고, 일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육상 문화유산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라면, 바로 이런 우리의 역사 속 땀과 의지일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