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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먹고 대화하고 사랑하세요… 그게 행복의 길입니다”

입력 | 2019-05-15 03:00:00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한 고성수도원 유덕현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고성수도원의 유덕현 초대 아빠스는 13일 수도원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찾고 위로 올라가는 것만 바라기 쉽지만 평범하고 단순한 삶 속에서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며 “우리는 모두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성=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최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고성 수도원이 ‘아빠스(abbas)좌(座)’ 수도원으로 승격했다. 올 2월 이탈리아의 몬테 올리베토 총원이 승격 교령을 발표했고, 초대 아빠스로 수도원 원장인 유덕현 신부(58)가 선출된 것. 한국의 아빠스좌 수도원 탄생은 왜관 수도원의 전신인 백동 수도원이 1913년 아빠스좌로 승격된 지 106년 만이다.

아빠스는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로 베네딕토 계열 수도회의 대수도원장을 일컫는다. 사제 서품 권한만 없을 뿐 주교에 준하는 권한을 갖는다. 유 아빠스를 13일 경남 고성군 대가면 수도원에서 만났다.

“옛 은수자(세속을 떠난 수도자)들은 동굴에서 혼자 살았고, 사막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사막은 하느님을 만나는 고독의 장소입니다. 침묵하는 시간은 사막 대신 고독의 장소가 됩니다.”

수도원은 고속도로를 나와서도 백로가 서성이는 논을 지나 10여 km를 더 들어간 산자락에 있었다. 작은 간판이 달린 정문을 지나자 새소리만 가득했다. 수도자들은 낮에는 가능하면 작은 소리로 적게 말하는 ‘소침묵’, 밤에는 전화기도 끄고 큰일이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않는 ‘대침묵’을 실천한다. 유 아빠스는 “통화가 잘 안 돼 답답해하는 외부 분들도 있지만 그러니까 수도원”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시에나의 몬테 올리베토 대수도원 총원에서 올해 3월 열린 유덕현 아빠스(왼쪽) 축복 예식. 가운데가 디에고 마리아 로사 총아빠스다. 고성수도원 제공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고성 수도원이 아빠스좌로 승격한 건 수도 공동체의 저력과 위상이 반영된 것이다. 해마다 가톨릭 신자 등 약 1만 명이 고요를 찾아 고성 수도원으로 피정을 온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삽니다. 매일 하느님께 의탁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묵상하고, 형제를 사랑합니다. 우리의 소박한 삶이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가 됩니다.”

수도원에 신부와 수사 등 30명이 하루 기도 7번, 미사 1번, 성경 읽는 시간 2번, 오후 노동의 일과를 되풀이한다. 양봉, 액체 비누 제조와 함께 이탈리아의 연합회 총원에서 수입한 포도주와 올리브를 팔기도 한다.

“이런 생활이 쉽지 않거든요. 내 존재도 없는 거 같고…. 고요해 보여도 내적으로는 이기적이고 헛된 생각을 물리쳐야 하니 영적 투쟁이 많지요.”

유 아빠스의 사목 표어는 ‘TOTUS TUUS’(온전히 당신의 것). 신부가 아니었다면 장군이 됐을지도 모른다. 1986년 유 아빠스는 화학공학을 전공한 학군단(ROTC) 출신으로 군수사령부에서 미사일을 담당하는 전도유망한 대위였다. 국방부가 무기 체계를 공부해 오라며 유학을 권유해 준비하던 중에 “하느님이 나를 이끄시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우연히 부산에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가난한 동네에서 운영하는 ‘봉사의 집’에 갔다. 오토바이 마니아였던 그는 ‘할리 데이비슨’을 사려고 수년간 모았던 돈을 수술비가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건넸다. 나중에 들른 수녀회 책장에서 산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려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딥니까.” 할머니 수녀가 답했다. “산속에 살면서 기도만 하는 곳이란다.” 유 아빠스는 1988년 7월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할 때 창설 멤버로 입회해 1998년 사제품을 받았고, 2013년 고성 수도원 원장에 선출됐다.

“부자는 더 큰 부자와 비교해서 불행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 불행합니다.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멀리서 찾지 마세요. 가족과 더 자주 밥 먹고 대화하고, 친구들과 함께하세요.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내 눈 앞의 사람을 사랑하세요.”

고성=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