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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음악을 듣다 문득, 스피커에서 바람이 불어올때

입력 | 2019-05-15 03:00:00


노르웨이 포크 듀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Riot on an Empty Street’ 앨범 표지.

2019년 5월 14일 화요일 맑음. 여름 운하.
#314Kings of Convenience ‘Cayman Islands’(2004년)

“운하 근처에 있는 바인데 정말 아름다워. 천장이며 여기저기가 아르누보 스타일이거든. 이쪽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바로 이 마을, 여기는 중앙역 근처이지만 관광객도 없고 정말 조용하지. 여름에 온다면 물이 깨끗해서 운하 어디서든 수영할 수 있을 거야. 난 주로 이쪽에서 여름 내내 수영하지.”

스마트폰 지도를 함께 보며 그 도시의 구석구석을 머릿속으로 누볐다. 지난겨울, 서울에서 만난 네덜란드 가수 H. 그가 고맙게도 암스테르담의 숨은 명소를 내게 알려줬다.

스피커에서 문득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다. 이를테면 노르웨이 포크 듀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Cayman Islands’를 재생할 때. 두 대의 통기타가 실 잣듯 가만히 풀어내는 꿈결 같은 분산화음. 첫 소절의 ‘F#M7’ 코드가 나오자마자 난 두 귀에, 아니 온몸을 향해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을 느낀다. 제아무리 분노에 차 총구를 치켜든 이라도 이 느닷없는 훈풍 앞에선 무장해제 되지 않을까.

‘케이맨 제도―낙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노래 제목을 인터넷 검색창에 쳐 넣으면 이런 문구가 반긴다. 카리브해에 있는 영국령 제도. 조세 피난처로 이름난 일종의 지상낙원이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두 청년이 노래하는 곳은 사실 케이맨 제도가 아닌 것 같다.

‘여기 운하들은/제자리를 맴도는 듯해/거기가 거기 같아/우리만이 다를 뿐/바람이 네 머리칼을 날려/내 시야를 덮고/나는 당신을 붙들어/내일까지 빌린 자전거를 타고.’

많은 이들이 이 곡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관한 노래라 추정한다. 노래 속 주인공은 떨어져 지내는 연인을 보려고 먼 길을 왔다. 비싸고 무모한 1박 2일짜리 암스테르담 여행이다. 일정이라곤 연인과 하루 내내 자전거를 타다 돌아가는 것뿐. 문득 운하에서 카누를 저어오는 남자를 보곤 실없는 농담이나 건네며 둘은 키득댄다.

‘수염이 덥수룩한 게, 꼭 케이맨 제도에서 여기까지 저렇게 노 저어 온 것 같지 않아?’

친구들은 그에게 이틀짜리 여행은 바보짓이라 했지만 그는 진즉 알고 있었다. 이 게으른 하루면 충분할 거라는 것. 바람에 날리는 연인의 머리칼을 보며 그는 또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이것이 이렇게 또렷한 행복일 줄은 사실 상상하지 못했다고.

문득 스피커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