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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의 주머니 사정을 판단하는 잣대

입력 | 2019-05-16 03:00:00


지난달 6일 북한 중앙TV가 공개한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 현장. 애초에 올해 4월 완공을 목표로 했지만 현지 골조공사도 마무리되지 않은 모습이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올해에 군민이 힘을 합쳐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을 최단 기간 내에 완공하자.”

“그 무엇에 쫓기듯 속도전으로 건설하지 말고 공사기간을 6개월간 더 연장하여 다음 해 태양절까지 완벽하게 내놓자.”

앞의 말은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이고, 나중은 그가 올해 4월 6일 원산을 방문했을 때 한 얘기다. 1년 4개월 만에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 직후 원산관광지구를 올해 태양절(4월 15일)까지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김정은은 완공 시점을 2019년 노동당 창건기념일(10월 10일)로 6개월 연장하라고 번복했다. 그리고 올해 4월에 다시 내년 4월로 6개월 더 연장했다. 두 차례의 연기 결정 모두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지 두 달쯤 지나 이뤄졌다.

김정은의 공사기간 연장 결정은 몇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냉혹한 현실에 대한 김정은의 깨달음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자기가 직접 정세를 주도하면 2년 내로 대북제재가 풀리고 북한에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오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이런 희망은 퇴색됐다.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은 제재를 푸는 것이 매우 어렵고, 현실이 절대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추정해 본다.

자금 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김정은은 지난해 5월 26일부터 올해 4월 6일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에 4차례나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그만큼 원산관광지구 건설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원산관광지구에 들어설 건물들은 애초 완공 시점으로 잡았던 올 4월까지 골조공사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더 많은 품이 드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북한은 2015년 평양에 2500가구의 미래과학자거리를 완공한 데 이어 2017년엔 4800가구 규모의 여명거리를 1년 만에 완공했다. 하지만 프로젝트 규모가 작은 원산관광지구는 2년 반이나 매달려도 완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강력한 대북제재로 북한의 자금줄이 꽁꽁 묶인 탓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건설 자금이 나오는 주머니가 다르기 때문이다. 평양 여명거리 공사는 김정은이 자기 주머니를 열지 않아도 가능하다. 하지만 원산관광지구는 오로지 김정은의 주머닛돈에 의존해서 건설해야만 한다.

평양의 거리 조성은 김정은이 구획만 지정하면 그 다음부터는 ‘돈주’들의 ‘돈 넣고 돈 먹기’판이 벌어진다. 북한에서 돈주는 권력을 가진 고위 간부들이다. 돈주처럼 보이는 사장이나 외화벌이 종사자들이 있지만 대다수가 돈과 권력을 틀어쥔 고위 간부들이 앞에 내세운 ‘바지사장’에 불과하다. 김정은이 벌여놓은 공사판은 권력자들이 돈을 불릴 좋은 기회가 된다. 최근 대북제재로 외화가 고갈돼 평양 집값이 하락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평양에선 아파트를 지어 팔면 투자금의 4∼5배를 벌 수 있었다. 부지와 건설 인력을 제공해 거리 조성의 최대 주역이 된 김정은도 완공된 주택의 절반 이상을 떼어 과학자, 교수, 예술인 등 정책적으로 챙겨줘야 할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며 생색을 낼 수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원산관광지구에 건설되는 호텔이나 상업시설은 팔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이 다양한 방법으로 회유해도 돈주들이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원산관광지구는 김정은의 주머니가 비게 되면 진척되기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아파트는 기본적인 내부 인테리어만 하면 되지만 호텔과 상업시설은 내부를 호화롭게 꾸며야 해 돈도 많이 든다.

김정은이 공사 기간을 연장한 것은 더 멋있게 짓겠다거나, 공사 담당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머니가 비어 자금을 대줄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강력한 대북제재가 유지된다면 원산관광지구가 북한의 계획대로 내년 4월에 완공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원산관광지구가 대북제재로 말라가는 김정은의 주머니 사정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사실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