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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손효림]주름 더할수록 빛나는 춤… 예술가의 늙음은 축복이다

입력 | 2019-05-17 03:00:00


손효림 문화부 차장

“새로운 시대의 춤을 추는 사람이 나와야죠. 관객이 저를 지겨워할 것 같기도 하고요.”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41)는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그는 다음 달 22, 23일 열리는 ‘지젤’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1997년 최연소(19)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지 22년 만이다. 고난도 기술을 깔끔하게 소화하고 캐릭터 해석력도 탁월한 그는 올가을부터 경희대 교수로 강단에 선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나이는 특히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몸을 쓰는 무용수에게 절정의 기량을 발휘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한데 그 기간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40대 여성 발레리나가 드문 국내 무용계에서 김지영은 지금까지 무대에 선 그 자체로 새 길을 개척한 셈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활동한 강수진 국립발레단장(52)은 2016년 ‘오네긴’을 끝으로 49세에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2014년 국립발레단에 출근한 첫날, 업무를 파악하고 취임식을 갖는 빡빡한 일정에도 단원 한 명 한 명과 면담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김지영은 상기된 얼굴로 “단장님이 나이는 신경 쓰지 말고 춤에만 집중하라고 하셨다”며 웃었다. 그때도 김지영은 발레단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김지영은 “단장님은 ‘마흔이 되면 춤추는 게 편해져’라고 자주 얘기하셨다. 그 말이 힘이 됐다”고 했다. 강 단장 스스로 나이의 한계를 극복했기에 확신을 갖고 격려했을 것이다. 강 단장은 말했다.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아요.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다 보니 시차 때문에 새벽에 눈뜨는 경우가 많은데 곧바로 방에서 연습해요.” ‘강철나비’의 긴 여정은 그렇게 이어질 수 있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수석무용수를 지낸 줄리 켄트(50·워싱턴발레단 예술감독)는 46세까지 무대에 섰다. 2012년 ABT 내한 공연 ‘지젤’에서 그가 보여준 우아하고 정교한 몸짓에 감탄했다. 그의 명성만 듣고 공연을 봤기에, 이후 켄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43세에 두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나이와 두 번의 출산이라는 만만찮은 허들을 넘어 기억에 또렷이 남는 무대를 보여준 그가 존경스러웠다.

문학은 연륜이 쌓이면 곰삭으며 빛을 발할 것 같지만 장르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이야기꾼으로 유명한 성석제 소설가(59)는 “소설은 정신적 근력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어서 나이가 들수록 들이는 힘에 비해 결과물은 시원찮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 1월 출간한 장편 역사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는 “역시 성석제”라는 호평 속에 사랑받고 있다. 고구려에서 시작된 승마 기술 ‘박차(拍車)’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도 준비 중이라니, 그의 ‘정신적 근력’은 짱짱한 듯하다.

103세로 현역 최고령인 김병기 화백은 지난달 10일 생일에 전시회 ‘지금, 여기’를 열었다. 3년 전부터 누드화에 집중하고 오방색에 심취한 그는 “인생처럼 작품에 완성은 없다”고 했다.

시간의 지층을 쌓아 성과물을 자아내는 예술가에게 나이는 세상이 그은 선일지 모른다. 그 선을 넘어서는 예술가들 덕분에 세상은 더 풍요로워지는 게 아닐까.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