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메이저리그 거포 새미 소사(전 시카고 컵스)의 헬멧이 강속구 빈볼에 맞아 부서지고 있다. 빈볼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찔한 순간이다. 동아일보DB
안영식 스포츠전문기자
억울한 것은 한두 개씩 나오는 ‘똥볼’이었다. 도저히 배트로 맞힐 수 없는 황당한 곳으로 공이 날아왔다. 마모 부위, 회전력 등 고무바퀴 두 개의 상태가 서로 다르면 나오는 현상이었다.
그 때문에 얼굴 앞이나 등 뒤로 공이 지나가 식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꼼짝 못 한 채 공에 맞아 멍이 들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의 속도가 시속 100km에 훨씬 못 미치고 연식 야구공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프로야구 타자는 ‘극한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야구 경기 중 공에 맞아 사망한 사례를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야구의 불문율을 어겼을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응징 수단이 빈볼이다.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도루하는 것, 과도한 홈런 세리머니 등은 종종 빈볼을 부른다. 이들 불문율의 핵심은 배려와 존중이다. 야구공과 방망이는 흉기로 돌변할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불문율이 생겨났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이듯 빈볼은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빈볼 시비는 끊이질 않는다. 올해는 지난달 28일 롯데-두산 경기가 대표적이다. 두산이 9-2로 앞선 8회말 2사 1, 2루에서 롯데 투수 구승민이 던진 148km 빠른 공에 두산 타자 정수빈이 등 부위를 맞았다. 팀의 주축 선수인 정수빈은 갈비뼈가 부러져 당분간 결장이 불가피하다. 부상 이전의 경기력을 시즌 내에 보여 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이 장면을 TV 생중계로 봤던 필자는 뒷맛이 씁쓸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빈볼에 대한 안일한 인식 때문이다. “심판이 현장에서 조치하지 않은 사항은 상벌위원회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KBO의 이런 입장에선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빈볼을 추방하거나 줄여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없다.
심판이 미처 보지 못한 것, 인지하지 못한 경기 상황에 대한 판정에 도움을 받고자 비디오 판독이 실시되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의 비디오 판독 대상은 홈런 여부와 외야 타구의 페어-파울, 몸에 맞는 공(사구) 등 모두 8개 항목이다. 팀당 2차례 기회가 주어지며 판독시간은 최대 5분이다.
빈볼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침묵의 카르텔’ 때문이다. 오늘의 빈볼 피해 팀이 내일은 가해 팀이 될 수 있기에 양심선언은 나오지 않고 있다. 왜곡된 동업자 정신이다. 결국 빈볼이 빈볼을 부르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시대는 변했고 스포츠도 변해야 한다.
소중하게 지켜져야 할 야구의 불문율을 어긴 선수나 팀에 대한 응징은 팬심에 맡기자. 빈볼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상해죄 또는 살인죄도 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행위다. 불문율 운운하며 빈볼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
빈볼을 선수끼리는 안다. 최근 강백호(KT)가 에릭 요키시(키움)의 139km 헤드샷을 맞고 쓰러지는 아찔한 장면이 있었다. 글러브로 얼굴을 감싼 채 안절부절못하는 요키시는 물론이고 한참 만에 털고 일어난 강백호의 표정은 “빈볼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두 팀 감독의 격앙된 반응과 벤치클리어링까지 나온 롯데-두산전의 정수빈 사구 때와는 사뭇 달랐다.
더도 덜도 말고 어린이날만 같았으면 좋겠다. 야구장을 찾은 많은 어린이를 의식해서인지 올 어린이날에도 빈볼 등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점수 차가 많이 나는 경기에서도 두 팀은 막판까지 최선을 다했다. 팬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린이날 경기에 출전하는 마음가짐을 시즌 내내 유지하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안영식 스포츠전문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