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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진구]고맙다, 이상화

입력 | 2019-05-18 03:00:00


‘빙속 여제’ 이상화(30)의 허벅지에는 얼굴처럼 선글라스를 끼울 수 있다. 허벅지 둘레가 약 60cm에 달해 웬만한 마른 여성의 허리둘레 정도 되기 때문이다. 이는 피나는 훈련의 결과물이다. 보통 여자 선수들은 스쾃을 120∼140kg 정도로 하는데 이상화는 170kg가량으로 했다. 폭발적인 스타트 훈련은 초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인 모태범과 함께 했다고 한다.

▷이상화는 애초에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운동을 하고 그만둘 뻔했다. 부모님으로서는 같은 운동을 하던 오빠(이상준)까지 둘을 지원하기 힘들었던 것. 하지만 계속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는 동생을 위해 상준 씨는 대신 운동을 포기하며 어머니께 “상화 뒷바라지 잘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집 지하실에 작업공간을 차려 봉제 일을 하며 딸의 운동을 지원했고, 새벽마다 도시락을 들고 연습장을 찾았다. 밴쿠버, 소치 겨울올림픽 500m 2연패, 평창 겨울올림픽 500m 은메달, 그리고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2013년 월드컵 2차전에서 세운 500m 세계신기록(36초36)…. ‘살아 있는 전설’ 이상화의 기록은 이처럼 피나는 노력과 가족들의 헌신적인 배려로 만들어졌다.

▷이상화가 16일 은퇴식을 갖고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화려한 영광 뒤엔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중압감이 있었다. 경기도 하기 전에 모두 금메달로 정해 버려 밤새 잠도 못 자고 벌벌 떨어야 했고, ‘반짝 금메달’이란 말을 듣기 싫어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다음 올림픽까지 내리 4년간 훈련만 해야 했다. 특히 지난해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는 극심한 부진에 빠졌었다. 고질적인 무릎·종아리 부상에 시달렸고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기도 했다. “마음은 나가는데 발끝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가족에게 울고불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화는 절치부심했다. 초반 100m 추진력을 높이기 위해 10년 이상 써 온 금색 날을 높이가 낮은 파란색 날로 교체했다. 평창에서 은메달을 딴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루 7차례 울리게 맞춰 놓은 알람을 꺼버린 것이었다. 기상, 오전·오후 훈련 등 하루를 철저히 설계했던 이상화는 은퇴식에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2000년 전국동계체전에서 남자 선수나 여자 중학교 선수들을 능가하는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초등부 500m, 1000m를 석권한 뒤 근 20년간 한국 빙속의 신화를 써오면서 어린 소녀, 젊은 아가씨가 감내해야 했던 중압감과 의지, 투혼이 느껴져 국민들도 마음이 찡했고, 고마웠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