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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더라도 초구는 스트라이크” 초등생 때부터 단련

입력 | 2019-05-18 03:00:00

메이저리그 지배 ‘제구력 괴물’ 류현진의 비밀




올 시즌 더 정교해진 제구력을 무기로 상대 타선을 압도하며 메이저리그 각종 투수 지표에서 최상위 자리에 올라 있는 LA 다저스의 류현진. 타자 쪽으로 몸을 끌고 나오고 공을 뿌리면서 오른쪽 디딤발을 길게 내딛는 투구 자세는 초등학교 때부터 반복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 가다듬어졌다.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다움에서 벌어진 워싱턴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물다. 마운드에 올라 공 몇 개로 타자를 쉽게 삼진으로 잡거나 범타로 돌려세우는 투수. 게다가 볼넷은 거의 주지 않으면서 많은 이닝을 책임져 주는 투수.

올 시즌 LA 다저스의 류현진(32)이 그렇다. ‘공을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절정의 제구력을 무기 삼아 타자들을 속전속결로 압도하고 있다. 투구 수 100개면 8, 9회를 쉽게 맞이한다. 미국 언론이 먼저 ‘제구의 마술사’로 불리며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투수 그레그 매덕스(전 애틀랜타, 시카고)의 이름을 꺼내 류현진과 비교하고 있다.

류현진의 제구가 얼마나 완벽한지 굳이 기록을 꺼내 보자면 18일까지 WHIP(이닝당 출루 허용률) 0.73, K/BB(삼진/볼넷 비율) 18.00, P/IP(이닝당 투구 수) 13.7개로 단연 메이저리그 전체 1위다. 볼넷이 적으니 이닝당 투구 수가 적고 이닝당 출루 허용 수치도 낮다. 투구 수가 적어 수비 시간이 짧아지니 타구에 대한 수비수들의 집중력까지 좋아진다. 반대로 상대 타자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류현진표’ 제구력의 근간은 무엇일까. 류현진은 이달 8일 애틀랜타와의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둔 뒤 “어릴 때부터 언제나 제구에 신경을 쓰면서 던졌기 때문에 지금의 제구력을 만들 수 있었다”고만 짧게 밝혀서 궁금증이 크다. 도대체 어떻게 가다듬은 걸까.

○ 초등학교 때 잡힌 제구의 ‘디테일’

류현진의 모교 인천 창영초를 찾았다. 이호영 전 창영초 코치는 제구력을 처음 익힐 당시 류현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투수로의 성장 가능성을 본 4학년 류현진에게 이 전 코치가 먼저 했던 주문은 3가지. ‘투구 시 왼쪽 팔이 넘어올 때 눈 앞쪽에 보이는 포인트에서 일정하게 공을 놓을 것’과 ‘와인드업 후 발을 뻗고 땅에 내딛는 지점까지의 거리를 투구판에서 9발자국(당시 류현진의 신발 크기 기준) 정도로 유지할 것’, ‘투구판 3루 쪽에서 3분의 1가량 안쪽 지점을 밟고 던질 것’이었다. 이 전 코치는 “키킹(디딤발을 들어올리는 것) 시 왼팔이 뒤로 젖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타자 방향으로 몸 중심을 많이 끌고 나가는 투구 동작이 제구나 공의 속도 면에서 현진이에게 적합하다 싶었다. 스트라이드(디딤발을 땅에 내딛는 동작) 폭도 처음에는 좁아서 투구 폼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렸고, 투구판 밟는 위치도 조정했다”고 했다. 이 전 코치는 “지금 현진이 투구 폼을 보면 그때와 거의 변한 게 없다. 본인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전 코치는 지도자의 주문을 자기 것으로 만든 ‘어린이 류현진’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 전 코치는 “경기에서 던지고 나면 이틀 걸러 한 번씩 50∼60개 정도 투구 연습을 하게 했는데 금방 적응하더라”며 “경기든 연습이든 투구를 한 날에는 무조건 학교 운동장을 20바퀴 정도 뛴 것이 하체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 초구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로

“초구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로 던지라고 했죠.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때 현진이가 던진 초구가 90% 이상 스트라이크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정식 경기에 나선 류현진에게 이 전 코치는 제구에 대한 뚜렷한 목표 의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맞더라도 초구는 스트라이크를 넣는 데 집중하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연습 때는 10개 중 무조건 8개 이상을 스트라이크로 넣도록 시켰다고 했다.

이 전 코치는 “현진이가 오른쪽 타자 몸쪽으로 직구를 던지려고 하면 일부러 포수를 홈플레이트 중앙에서 안쪽으로 이동시켜서 확실한 포인트에 포수 미트를 갖다대게 했다. 그러니 몸쪽 직구 제구력이 날로 좋아졌다. 나중에는 강약 조절까지 하면서 스트라이크를 잡더라”고 했다. 이 전 코치는 류현진이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활용해 던져볼 수 있도록 실전 경기에서는 전혀 사인을 내지 않는 배려를 했다.

이 전 코치는 “초등학교 때 현진이를 투수에서 중견수로 교체했던 일이 있다. 상대가 중견수 앞 타구를 쳤는데 그 공을 잡아 1루로 빠르게 던져 아웃을 시키더라. 우익수가 그런 식으로 타자를 아웃시키는 건 봤어도 중견수 앞 땅볼은 처음 봤다. 중견수 자리에서도 제구가 된 것”이라며 웃었다.

○ 하늘로 캐치볼

안정된 제구력은 어떤 구종을 던지든 일정하게 유지되는 투구 자세에서 나온다. 중고교 시절 체격이 성인 수준으로 커지는 상황에서 투구 자세의 밸런스를 지켜낸 것도 현재 류현진의 제구력에 한몫했다.

중학교 스승인 이찬선 전 동산중 감독은 “무사 만루 상황에서도 공이 위로 벗어나거나 땅에 처박히는 경우가 없었다. 아무리 긴장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기 폼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류현진과는 창영초, 동산고 동기여서 포수로 호흡을 맞췄던 현천웅 청원고 코치 역시 “고교 입학 전후로는 삼진보다는 완급 조절로 유리한 카운트를 만들고 맞혀 잡았다. 그러면서 투구 밸런스가 더 일정하게 유지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제구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또 한 가지의 ‘연습 루틴’도 있다고 했다. 투수들은 대개 마운드에 오르기 전 어깨를 풀기 위해 거리를 늘려가면서 캐치볼을 한다. 롱 토스라고 하는데 류현진은 다른 방법으로 준비했다.

“보통 직선으로 던지는데 현진이는 하늘로 공을 던져 포물선을 크게 그리도록 캐치볼을 해요. 경기에서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질 때 회전을 더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밸런스를 잡기 위해 왼쪽 팔을 앞으로 길게 뻗고자 하는 목적일 수도 있죠. 정확한 건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제구가 더 좋아졌어요. 당시 현진이가 던질 때면 심판분들로부터 ‘알고도 못 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현 코치)

○ 프로 데뷔전서 특급 좌타자들 사냥

2006년 한화에 입단해 그해 프로 데뷔전에서의 호투는 류현진이 제구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얻게 된 계기다. 신인으로 프로 무대에 적응하기가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한화 감독이었던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고문의 배려가 컸다.

김 고문은 “과거 쌍방울의 김원형이라든가 OB 박명환 같은 선수들은 데뷔 당시 어려움을 겪었다. ‘왜 이렇게 잘 안 될까’ 그런 걱정이 됐던 선수들이었다. 시범경기가 끝나고 이런 전례를 생각해 보면서 류현진을 언제 데뷔 등판을 시킬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 능력 있는 좌타자들이 많은 LG를 첫 경기로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이게 성공이 된 셈이다. 제구를 비롯한 여러 면에서”라고 말했다.

류현진은 데뷔 첫 경기 LG전에서 7.1이닝 3피안타, 탈삼진 10개 무실점 호투로 승리를 따냈다. 특히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좌타자인 이병규와 박용택을 스트라이크존 구석을 공략하며 5번이나 삼진으로 돌려 세웠다. 데뷔전에서 자신감을 얻은 류현진은 그해 18승 6패 1세이브로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투수 출신인 김 고문은 프로 초년생의 제구 능력에 확신을 갖고, 있는 그대로 지켜봤다.

“코치들에게 폼은 그대로 놔두자고 했죠. 제구력을 키우는 건 흔히 농구로 따지면 선수가 코트에 나와서 슈팅 연습하는 것하고 같다고 봐요. 슈팅을 하면서 손끝으로 ‘이게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느낌이 오잖아요. 투수도 마찬가지인데, 현진이의 손끝 감각을 믿었죠. 제구에 대해선 마운드 위에서 어떤 일이 있든 표정 변화를 보이지 말라는 얘기만 자주 강조를 했어요. 때마침 현진이가 데뷔한 해에 구대성이 돌아왔고, 송진우도 건재했고… 내로라하는 좌투수 선배들에게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다고 봐요.”

현역 시절 압권의 제구력을 뽐냈던 이상군 전 한화 감독대행도 “류현진이 송진우나 구대성 선배를 통해 익힌 체인지업 같은 구질의 제구를 가다듬어 경기 중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활용해 보면서 흔들림 없이 작은 공간에 일정하게 공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됐다”고 치켜세웠다.

○ 복합적 계산이 담긴 2019년 제구

올 시즌 류현진의 제구는 한층 위력이 배가됐다. 단순히 코스로 타자의 약점을 공략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얻고 있다. 김 고문은 류현진이 상대의 분석을 흩트러뜨리는 복합적 계산이 담긴 투구를 하고 있다고 봤다. 실제 류현진이 애틀랜타전 완봉승 이후 “체인지업 스피드를 낮추면 각도가 커진다”고 했던 것처럼 구질에 다양한 변화를 주고 제구의 집중력을 높이고 있는 게 보인다.

김 고문은 “올 시즌 달라진 게 던질 때 순간 동작이 빨라졌다는 것이다. 현진이한테 물어보니 투구 동작에서 힘을 모으는 순간까지의 타이밍은 이전과 같지만 그 이후는 빨리 가져간다고 하더라. 타자 입장에서는 공의 회전력이 더 살아서 빨리 들어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짚어 보면 얼마나 하체 운동을 많이 했는지 느껴진다. 예전보다 허리를 더 틀고 공을 더 빨리 가지고 나오면서 제구의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다”며 놀라워했다.

이런 제구력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도 ‘버릴 게 없는 공’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류현진이 마운드 위에서 빼고, 넣고, 밀어붙인 공 하나하나의 의미를 짚어 보면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가 될 듯하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