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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으로 日경찰 유인 후… 고금도 주민들 학교 모여 “독립만세”

입력 | 2019-05-18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6화> 전남 완도




이대욱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장이 2003년 옛 소안사립학교 터에 세운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1886년 7월 25일 전남 완도군 소안도. 섬 주민 200여 명이 맹선리 짝지에 집단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이 난 지 2개월 뒤 현장을 조사한 일본영사관 직원은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나카무라와 그의 집을 습격해서 일본풍 건물과 가옥 3채를 불태우고 저장 창고에서 술과 된장에서부터 의류 가재도구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불태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국토를 불법으로 유린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삶의 터전인 어장을 지키려는 소안도 주민들의 첫 의거였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1909년 2월 24일 새벽녘 소안도 맹선리를 출발한 작은 배가 3.7km 떨어진 당사도 등대 아래 절벽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일본이 만든 당사도 등대는 조선에서 수탈한 물자를 실어 나르던 일본 상선의 뱃길을 밝히는 역할을 했다. 소안도 출신 동학군 이준화와 마을 청년 6명이 배에서 내려 바위를 타고 기어올랐다. 잠시 후 네 발의 총성이 어둠을 갈랐다. 등대를 지키던 일본인 간수 등 4명이 죽고 등명기는 바다에 던져졌다. 등대가 불을 밝힌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주민들의 기개를 보여준 이 사건은 본격적인 완도 항일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 남도 외딴섬에서 울려 퍼진 만세 함성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이 있은 지 10년 뒤 발발한 1919년 3·1운동에 완도 주민들은 또다시 일어섰다. 소안도의 송내호 정남국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정태 백태윤 등이 완도읍 나봉균 최사열과 함께 완도읍 장날인 3월 15일 거사를 일으켰다. 청년 지식인들이 주도한 이날 시위는 일제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해산되었다. 유관순 열사가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인 날보다 보름이나 빠른 시기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지 78년 만인 2005년 소안항일운동기념공원에 복원된 사립소안학교.

2차 시위는 완도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3월 하순 목포에서 전국의 시위 상황을 접하고 온 차종화가 김우진과 만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다. 4월 7일 보통학교 기숙사에서 김우진 차종화 박응두 문종렬 이철암 김기찬 등이 모여 다음 날로 예정된 시위 계획을 점검했다. 각자 태극기를 준비하고 등교해 운동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가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7일 밤 주민들에게 시위 사실을 알리는 벽보를 붙이다 일제 경찰에 발각돼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매일신보’ 4월 11일자에는 이 사건 직후 해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일부가 완도로 파견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시위 주동자였던 김우진 차종화는 구속돼 그해 4월 22일 광주지법 장흥지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다. 당시 신지면에서도 임재갑 임재경 김재교 등이 상산(해발 300m)과 독계령에 태극기를 꽂고 산상(山上) 시위를 벌였다.

1년 뒤 만세운동의 불씨는 고금도에서 다시 타올랐다. 1920년 1월 고금보통학교에 다니던 정학균과 이현렬 홍철수 이수열 등은 고종 황제 서거 1주기인 1월 22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정학균이 기숙사에서 태극기 70장을 만들고 이현렬은 격문을 제작했다. 오전 11시경 덕암산 정상에서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 경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그 틈을 타 고금보통학교 앞에서 300여 명의 군중이 집결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80여 명이 체포됐고, 주동자인 정학균 등 6명은 기소돼 옥고를 치렀다(‘완도군 항일운동사’).


○ 국내 항일운동의 3대 성지


이처럼 완도 3·1운동은 1919년 3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차 시위는 청년 지식인 종교인들이, 2차와 3차 시위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3·1운동 당시를 방불케 하는 시위가 전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높은 교육열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완도 유지들은 신학문과 신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1905년 사립육영학교(1911년 완도공립보통학교로 변경)를 시작으로 소안도에 개교한 사립중화학원(사립소안학교 전신), 노화도의 사립영흥학교, 고금도의 약산사립학교 등 근대적인 사립학교가 곳곳에 세워졌다. 당시 사립학교는 근대 민족의식을 키우는 터전이었다. 선각자들의 민족 교육은 청년들이 항일의식을 키우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완도 항일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송내호(1895∼1928·건국훈장 애족장)다. 소안도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한 뒤 완도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사립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 사립영흥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1914년 비밀결사체인 ‘수의위친계’를 조직해 완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경상도에까지 인맥을 형성하고 1915년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로 배달청년회를 조직했다. 그는 1927년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검거돼 옥고를 치르던 중 폐결핵이 악화돼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 송기호(1900∼1928·건국훈장 애족장)도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 3·1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됐다. 이 형제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순국했지만 항일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완도의 3·1운동은 1920, 30년대 소안도와 고금도, 신지도, 약산도 등지의 청년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이념적 토대가 됐다. 박찬승 한양대 역사학과 교수는 ‘완도군 항일운동 전개 과정’이란 논문을 통해 완도가 민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걸출한 운동가를 배출한 배경으로 신교육과 청년들의 진보적인 사고, 부유한 경제 여건 등을 꼽았다. 박 교수는 “섬으로 이뤄진 완도는 지리적 여건상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데 장애가 많았지만 국가와 민족, 마을이 위기에 처하자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나서 공동체를 구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가보훈처로부터 포상을 받은 완도지역 독립유공자는 59명이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지만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사는 이보다 훨씬 많다. 2000년 발간된 ‘완도군 항일운동사’에 완도군의 민족운동가로 소개된 이는 모두 122명이다. 부산 동래, 함경도 북청과 함께 완도가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


○ 구국의 횃불을 들어올린 소안도


완도군에서 항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소안도다. 항일 독립운동가 89명을 배출했고 이 중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인사만 20명에 달한다. ‘편안히 살 만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소안도(所安島)는 일제강점기에 그리 편안하지 못했다. 완도읍 본섬에서 한참 떨어진 데다 인구가 6000여 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교육운동과 노농운동, 비밀결사와 법정투쟁 등을 벌이며 암울하고 참담했던 시기를 꿋꿋하게 버텨냈다.

1994년 동아일보와 전남도, 완도군, 신지도 주민들이 선열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신지항일 운동기념탑.

일제를 상대로 13년의 법정공방 끝에 승소한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이 대표적이다. 1905년 일제가 소안도 주민의 토지 전체를 몰수해 사도세자의 5대손이자 일제로부터 자작 칭호를 받은 이기용에게 넘겨주자 1909년 소송을 제기해 1921년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기쁨은 사립소안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소안도 주민들은 1913년 문을 연 사립중화학원을 정규 학교로 승격시키기로 하고 1만454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70원인 점을 감안하면 꽤 큰 액수다. 사립소안학교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달지 않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항일정신을 가르쳤다. 일제는 이 학교를 ‘항일운동의 배후’로 지목하고 1927년 강제 폐교했다. 소안도 주민은 격렬히 저항했고 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탄원서를 돌리기도 했다. 이 일로 주민 800여 명이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가 자신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조선인을 지칭)으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다. 이후에도 주민들은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살자회 등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어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소안도 주민들은 감옥으로 끌려간 이웃을 생각하며 엄동설한에도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할 정도로 유대감이 강했다.

이대욱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65)은 “일제강점기 소안도 주민이 투옥된 기간을 합하면 300년이 넘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정신이 드높았다”며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추모제와 전국학생백일장대회, 당사도 등대 습격 재현 행사 등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 1년내내 섬 전역에서 태극기가 펄럭… ‘전국 유일’ ▼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대한-민국-만세’호 여객선 운항… ‘나라사랑’ 무궁화 섬으로도 유명

완도읍 화흥포항과 소 안도항을 오가는 여객 선 대한호. 뱃머리에 태극문양이 선명하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소안도는 전남 완도군에서 남쪽으로 17.8km 떨어져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남쪽으로 제주도가 보인다. 소안도를 가려면 완도읍 화흥포항에서 하루 10∼12회 운항하는 여객선을 이용해야 한다.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여객선 3척이 운항하는데 이름이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이다. 배를 띄우는 소안농협은 2015년 소안도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배에 태극 문양을 그려 넣고 카페리 3호, 5호, 7호의 선명(船名)도 바꿨다. 소안도 선착장에 내리면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가장 먼저 반긴다.

소안도는 1년 내내 섬 전역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전국 유일의 고장이다. 태극기 게양은 대한민국국기법에 따른 규정이 있다. 아무 때나 게양할 수 없기 때문에 완도군은 2013년 소안도에서 365일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했다. 1365가구와 상가, 학교, 관공서에서 내건 태극기 수만 1500여 개에 달한다. 바닷바람이 강하게 부는 탓에 가구마다 태극기를 한 해에 6번 정도 교체한다.

소안도는 무궁화의 섬으로도 유명하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등급인 노란 무궁화(일명 황근)의 자생지다. 완도군은 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란 무궁화 동산을 꾸미고 도로변에 화단을 조성하며 소안도가 ‘민족의 섬’이라는 것을 알리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2003년 건립된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소안도 주민의 끈질긴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곳이다. 기념관 맞은편에 복원한 사립소안학교는 주민들을 위한 평생학습원과 작은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허정수 완도군 복지행정국장(57)은 “태극기와 무궁화의 섬인 소안도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물론 항일운동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명소인 만큼 중고교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로 제격”이라고 말했다.

완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