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어땠을까? 과학기술이나 위기대응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진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있다. 특히 세종대왕은 어떻게 재난을 예방하고 대비할 것인지, 재난이 발생한 후엔 어떻게 맞설 것인지에 관해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세종은 평소 재난의 작은 기미에도 즉각 대응했다. 큰비가 내리면 곧바로 침수 상황을 확인하고 수재(水災) 발생이 우려되는 곳을 점검하게 했다. 여러 날에 걸쳐 비가 내릴 때는 반드시 수재가 있을 것이니 수문(水門)을 열어 물이 통하게 하고 관원들이 밤새 순시하도록 지시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겨울 중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지자 “강의 얼음이 얇아져 사람이 빠질까 염려된다. 각 나루터에서는 얼음을 깨고 사람을 건너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으니 사고 예방에 대한 세종의 철저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기적인 대응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여유가 있는 고을의 곡식을 흉년이 예상되는 고을로 옮겨놓게 하는 등 언제 닥칠지 모를 재난에 대비해 구휼 물품을 항시 준비하도록 했다. 기근이 닥쳤을 때 식량 이외에 종자용 곡물을 추가로 지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세종은 재난 발생 시 굶주리거나 병든 백성들의 현황을 관(官)에서 선제적으로 조사하도록 했다. 이때 반드시 해당 고을 수령이 직접 다니며 확인하고 구제에 나서도록 했다. 이런 책임을 다하지 못해 백성 구제에 실패할 경우 그 수령에게는 곤장 90∼100대의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관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응을 펼치게 함으로써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재난에 대비하고 신속히 대응한다고 해도 재난의 강도가 너무 세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개별 도(道)나 군현의 역량만으로는 재난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 대표적 예다. 이런 경우엔 무엇보다 컨트롤타워가 중요하다.
세종 18년, 몇 년째 전국적으로 흉작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특히 충청도가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세종은 10년 넘게 호조판서로 재임한 안순(安純)을 도순문진휼사로 충청도에 파견했다. 종1품 재상급 대신을 최고 구휼책임자로 임명해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충청도 전체뿐 아니라 다른 지역과 중앙정부기관의 협조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도록 한 조치였다. 안순은 과거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충청도 각 고을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구휼 임무를 맡길 최적의 적임자였던 셈이다. 실제로 안순은 짧은 시간 안에 충청도 구휼에 성공했으며, 죽을 위기에 처했던 많은 백성을 살려내 다른 지역의 모범이 됐다.
이런 전문가 중심의 위기대응 방식은 세종의 재위 기간 내내 일관됐다. 천재지변과 전염병, 기근이 심각한 고을에는 그 지역 수령이나 관찰사를 임명하고, 해당 분야 업무를 잘 아는 대신을 책임자로 임명해 재빨리 내려 보냈다. 덕분에 피해를 조기에 수습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세종의 이 같은 재난 대응 방식은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철저한 예방과 준비, 매뉴얼과 전담기관에 의한 평시 재난 관리, 재난 발생 시 컨트롤타워를 통한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 확립 등은 그동안 여러 참사에서 우리가 늘 아쉬워하던 부분이다. 비단 천재지변뿐 아니라 기업 경영 등 각 영역의 위기관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대학 연구교수 akademie@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