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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한 선율-침울한 스토리… ‘우울함’에 빠져들다

입력 | 2019-05-20 03:00:00

[컬처 까talk]음악-영화 ‘글루미 콘텐츠’ 인기




기괴하고 우울한 이미지로 10대의 우상이 된 미국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의 데뷔 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 표지.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제공

“여기 혹시 빌리 아일리시 주황색 카세트테이프 있어요? 와, 여기 있다!”

17일 서울 마포구의 음반 매장 ‘도프 레코드’. 한 고교생이 들어오더니 아일리시의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자마자 계산대에 들이밀었다. 18세의 아일리시는 올 들어 가장 뜨겁게 떠오른 신인 팝스타다.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찍더니 노래 ‘bad guy’는 멜론 등 국내 음원차트 10위 안까지 치고 올라왔다. 팬 충성도의 척도인 실물 음반 판매량도 압도적이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퀸 열풍을 아일리시가 이어받았다. 카세트테이프만 200장 가까이 팔렸고 LP레코드와 CD 판매량도 올 상반기 압도적 1위”라고 했다. 그는 “구매자의 절대다수가 10대로, 그들이 이렇게 어두운 음악에 열광하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몽유병, 잔혹극, 공포물을 뒤섞은 음악과 영상이 아일리시의 전매특허다.

서브컬처(주변부 문화) 마니아의 전유물이던 음울한 콘텐츠, 이른바 ‘글루미(gloomy) 콘텐츠’가 주류 문화계를 점령하고 있다.

○ 콘텐츠 시장은 제2의 세기말

가히 제2의 세기말이라 할 만하다. 공포와 죽음, 종말을 다룬 콘텐츠가 문화계 총아로 떠올랐다. 올해 인기를 끈 넷플릭스 시리즈물 ‘킹덤’ (왼쪽 사진)과 영화 ‘버드박스’ (오른쪽 사진). 넷플릭스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드라마 ‘왕좌의 게임’도 예외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 작품들은 어두운 분위기의 화면, 영웅들의 잇따른 참패나 죽음으로 블록버스터로서는 이례적인 음울함으로 도배됐다. 일부 관객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봤다가 더 침울해졌다”고 호소한다. ‘킹덤’ ‘블랙미러’ ‘기묘한 이야기’ ‘버드박스’ 등 기괴하고 어두운 콘텐츠를 내세운 넷플릭스의 대중화도 이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팝 음악계에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커트 코베인(너바나)이 대표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열풍 이후 자기 파괴적 음악이 이만큼 대중적 열광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글루미 콘텐츠는 자기 과시와 힘자랑 이미지가 세던 힙합도 접수했다. 지난해 요절한 래퍼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대표적이다. 그의 곡 ‘SAD!’는 스포티파이 단일 곡 일간 스트리밍 역대 최고 기록(약 1040만 건)을 갈아 치웠다. 강일권 대중음악 평론가는 “요즘 대세인 내면의 어두움을 담은 이모 랩(emo rap)은 아예 자살충동, 약물중독, 패배감, 우울증이 주요 소재가 됐다”며 “2017년 래퍼 릴 핍, 2018년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실제로 비극적 죽음을 맞으며 10, 20대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영국의 BBC와 텔레그래프, 미국의 바이스 등도 ‘다크 팝’ ‘테러 팝’ 같은 용어를 쓰며 ‘팝은 왜 점점 더 우울해지는가’ 같은 분석 기사를 앞다퉈 내고 있다. X세대와 Z세대의 연결고리를 찾기도 한다.

밝고 힘찬 댄스 팝이 점령한 듯 보이는 국내 음악계에서는 신세대 R&B 가수들이 이런 조짐을 보인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수민, 수란, 제이클레프 등 음악 팬들이 열광하는 신진들의 음악에 어둡고 축축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관통한다”고 했다. 올해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제이클레프의 앨범 타이틀곡은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이었다.

○ 냉소, 절망… 디스토피아적 심리 발현

직장인 김아름 씨(32)는 얼마 전 서점에 갔다 제목과 표지만 보고 만화 ‘기분이 없는 기분’(창비)을 구매했다. 김 씨는 “주인공 부친의 고독사 이후 우울감을 다룬 내용에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때로는 ‘괜찮아질 거야’ ‘힘내’란 말조차 작은 폭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처럼 우울감에 빠져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주인공의 모습부터 빨려들었다”고 했다. 성인은 물론이고 아동 출판 시장에서마저 죽음을 다룬 ‘3일 더 사는 선물’(씨드북), 가정폭력 문제를 짚은 ‘아빠의 술친구’(씨드북) 같은 작품이 속속 나와 주목받고 있다.

음울함에 대한 열광은 여러 분석을 낳는다. 밝고 예쁘장한 것들로만 가득한 인스타그램 세상에 대한 피로와 상대적 허탈감이 반영된 것이라는 추론도 나온다. 어두운 사회상을 그대로 비추는 것뿐이라는 일반론도 세다. 미묘 편집장은 “남들의 불행을 보며 이를 관망하는 자신의 처지를 즐기는 심리도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무한 생존경쟁 구도가 더 고착됐다. ‘더 이상 메시아는 없다’는 절망감이 영웅에 대한 냉소, 디스토피아적 사고로 나온 것 같다. 밝은 쪽에서는 소확행과 워라밸 추구로, 어두운 쪽으로는 글루미 콘텐츠 붐으로 발현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임희윤 imi@donga.com·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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