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는 1956년 딸 말리를 데리고 한국을 찾았다. 6남매 중 셋째로 당시 오리건대 간호학과를 갓 졸업한 21세의 꿈 많은 아가씨였던 말리의 인생은 부모를 따라 나선 그 한국행을 계기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말리는 오리건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떠난 것 말고는 평생을 한국에서 고아와 장애인들을 위해 살았다. 17일 84세를 일기로 제2의 고국 한국 땅에서 눈을 감은 말리 홀트 여사다.
▷1950년대 당시 미 연방법은 2명 이상의 해외 아동 입양은 허용하지 않았다. 해리-버사 부부는 지인들을 찾아 자문을 하고 의회 앞에서 시위도 하는 등 ‘투쟁’을 벌였고 1955년 연방 하원은 ‘특정 전쟁 고아 구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입양 고아의 숫자 제한을 완화했다. 이른바 ‘홀트 법안’이다.
▷해리가 1964년 한국 체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가 한국에 세운 아동복지회 활동도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으나 기우였다. 딸 말리는 전쟁고아에서 중증 장애인으로 돌보는 아이들의 범위를 넓혔고, ‘고아의 어머니’와 더불어 ‘장애아의 대모’가 되었다. 평생 독신이었지만 장애인과 고아, 그리고 미혼 부모들의 어머니이자 ‘말리 언니’로 살며 외롭지 않았다. 2012년 골수암 진단을 받았지만 “마지막 남은 생명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쏟겠다”며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방도 없이 4명의 장애인과 함께 지내며 헌신의 삶을 산 말리는 오늘 영결식 후 부모가 영면한 홀트일산복지타운 부지 내에 함께 묻힌다. 홀트 여사 집안이 2대에 걸쳐 낯선 나라에서 뿌린 희생과 봉사 정신을 실천으로 이어가는 것이 진정한 추모와 감사를 표하는 것이리라.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