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보고 봄이 왔음을 느끼고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을을 알아차립니다. 계절의 전령처럼 역사적 사건마다 전령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490년 필리피데스라는 아테네 병사가 승전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마라톤 벌판에서 아테네까지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아테네의 페르시아전 승리를 알리기 위해 달린 겁니다. 10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의 실상은 캐나다인 선교사 스코필드(1889∼1970)와 미국인 기자 앨버트 테일러(1875∼1948)에 의해 세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18일은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80년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언론을 완전히 통제한 채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습니다.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은 무장한 군인들로 차단돼 기자의 취재도 불가능했습니다. 언론매체들은 통제된 보도지침에 따라 폭동을 일으킨 광주의 폭도들을 군대가 나서 진압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스마트폰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없던 시절이니 광주에서 싸우던 시민들은 손으로 눌러 쓴 호소문과 확성기로 아우성칠 뿐이었습니다.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21일, 23일 두 차례 김사복 씨의 도움으로 광주에 내려와 역사 현장을 세계에 가장 먼저 알렸습니다.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광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힌츠페터는 외국 회사 직원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가족들을 데려와야 한다며 계엄군을 설득해 광주로 진입했습니다.
광주의 비극적 장면들이 힌츠페터의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겼습니다. 그는 취재한 필름을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과자 통에 숨겨 일본 도쿄로 빼돌렸습니다. 촬영 영상은 독일 방송이 보도했고 다른 나라들도 이 영상을 받아 송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힌츠페터는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이 영상물이 한국으로 흘러들어오면서 광주의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힌츠페터라는 전령을 통해 우리는 5·18민주화운동의 컬러 영상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는 죽으면 광주에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광주와의 각별한 인연을 죽어서도 함께하고 싶었던 바람대로 그는 옛 5·18 묘역에 묻혔습니다.
18일 김사복 씨의 아들 김승필 씨가 광주를 찾아 힌츠페터 추모비에 참배했습니다. 광주시는 힌츠페터와 경기 양주의 한 성당 묘지에 묻혀 있는 김사복 씨의 유해를 옛 5·18 묘역에 나란히 안장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