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원 9곳 세계문화유산 지정 회재 ‘홀로 즐거움 느끼는 집’ 한옥 묘미 아름다움 뒤엔 다수의 희생 따랐을 것 금속-기계 등 과학 기술 발전 힘입어 ‘현대판 독락당’ 초고층 아파트 지어져 모두의 독락 위해 서로 불편 감수해야
김도연 객원논설위원·포스텍 총장
서원은 대부분 해당 지역 출신의 저명한 유학자를 기림과 동시에 후학을 교육하는 두 가지 기능을 지닌 곳이었다. 한때 전국에 1000여 개에 이르는 서원이 있었지만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47개만 남았다. 이번 지정에 포함된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은 16세기 중종 때 이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등 최고위 관직을 지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을 모신 곳이다. 그는 퇴계 이황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을 이끈 대표적인 학자로 퇴계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옥산서원 인근의 경주 양동마을은 이미 2010년에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회재는 양동마을의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는데 이 가옥은 모두 세 명의 걸출한 인재가 태어나는 길지(吉地)로 전해지고 있다. 회재는 여기서 태어난 두 번째 현인으로 간주되기에 마을의 문중에서는 아직도 한 사람을 더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양동마을에서는 며느리가 아닐 경우, 시집간 딸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실제 해산날에는 서백당이 아닌 다른 집으로 보낸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하튼 회재처럼 태어난 곳, 그리고 사후에 모셔진 곳 모두가 세계문화유산인 경우는 전례가 없을 듯싶다.
누구나 독락당 같은 곳에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한 건축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경비가 들었을까? 그리고 독락당에서 살기 위해서는 평소에 얼마나 많은 일손이 필요했을까? 혹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락당에 사는 한 사람을 위해 그들의 삶을 희생해야 했을까?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함께 지정되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를 모신 곳인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퇴계의 재산은 땅이 100만 m²(약 30만 평) 이상이었으며 노비가 250∼300명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회재 역시 이와 비슷한 재력과 권세를 지니고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사실 이렇게 극소수를 위해 대부분의 사람이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것은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된 역사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 발전은 어렵고 힘들었던 인간의 삶을 바꾸었으며 특히 19세기 초의 산업혁명은 변화의 획기적 계기가 됐다.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산업이 있는 도시로 모여들어 인간적인 삶을 찾았다. 그리고 도시는 이들이 형성한 대규모 시장으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더욱 발전했다. 산업혁명 후 200여 년이 지난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도시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붐비는 도시에서 주택은 당연히 가장 큰 문제가 되었는데, 좁은 땅에 여러 주택을 짓는 방법은 이를 하늘 높이 쌓아 올리는 아파트 건설뿐이었다. 공동주택은 산업혁명 훨씬 전에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고층 아파트는 철강이 생산되어 건축에도 쓰이면서 가능해졌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없었다면 10층 이상의 건축은 틀림없이 외면당했을 것이다. 금속 및 기계 엔지니어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많은 사람들은 대도시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아파트 한 채, 한 채는 그곳에 살고 있는 각 가정의 독락당이 됐다. 물론 회재의 독락당과는 다르게 계곡 물소리 대신 소음이 있고 또 밖을 내다보아도 같은 고층 아파트뿐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엄청난 발전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 모두가 독락을 해야 하니 작은 불편은 서로 감수할 수밖에 없다.
김도연 객원논설위원·포스텍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