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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출신 아니라고 벤처인증 퇴짜… 신산업 막아선 소극행정

입력 | 2019-05-23 03:00:00

[대통령 위에 공무원, 규제공화국에 내일은 없다]
新산업 진입 막는 ‘3가지 덫’… 中-이집트보다 높은 규제장벽




《한국의 신산업 진입규제 환경이 세계 주요 경쟁 국가(54개국)와 비교해 38위로 하위권을 맴도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일본 독일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 중국 이집트보다 순위가 낮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한국의 신산업이 태동하지 못하는 ‘3대 덫’으로 ‘공무원의 소극행정’, ‘허가한 것을 빼고 모두 금지하는 포지티브 규제’, ‘시장 기득권의 저항’을 지목했다.》


인사노무 업체 대표 A 씨는 정보기술(IT) 기반 인적자원(HR) 업체로 사업을 전환해 벤처기업 인증을 신청했다. 벤처기업 인증이 되면 각종 정책자금 지원과 세제 혜택이 따른다. 하지만 인증에서 탈락했다. 이공계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벤처기업 인증에 부족한 점수를 채우기 위해 보충 자료를 제출한 끝에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다른 IT벤처 대표 B 씨도 이공계 전공이 아니어서 관련 학위를 취득한 뒤에야 인증을 받을 수 있었다. 벤처기업 인증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자신이 판단하기 어려운 기술력이나 사업성을 보기보다 기준이 명백한 학력과 전공을 따지는 행정편의주의 탓에 벌어진 일이다.

한국의 신산업 진입규제 장벽이 인도네시아, 중국, 이집트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2일 ‘경쟁국보다 불리한 신산업 분야의 대표 규제사례’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연구기관 ‘글로벌기업가정신모니터(GEM)’는 한국의 신산업 진입 규제 환경이 조사 대상 54개국 중 38위라고 평가했다. 미국(13위)과 일본(21위)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4위), 중국(23위), 이집트(24위)보다도 낮았다. 1위는 대만이 차지했고, 네덜란드(2위), 오스트리아(3위), 카타르(5위), 독일(8위) 등이 신산업을 하기에 유리한 환경인 나라였다. GEM은 영국 런던경영대학원과 미국 뱁슨대가 협력해 만든 국제 연구기관으로 매년 세계 각국의 기업가정신 현황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대한상의는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내 산업에서 신산업 진입을 가로막는 주요한 요소를 조사했다. 이 조사 결과 주요한 3가지 덫은 공직사회의 ‘소극행정’, ‘포지티브 규제’와 시장 내에서의 ‘기득권 저항’이었다.

규제를 풀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공무원의 태도에서 비롯된 소극행정은 한국 신산업 태동을 가로막는 대표적 요소로 지적됐다. 해외는 공무원들이 규제 완화를 돈 안 드는 가장 효과적인 투자라고 보는 반면에 한국은 규제 강화를 돈 안 드는 가장 확실한 리스크 방지 대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이오 에너지기업 C사는 2016년 정수장, 하수처리장 등 오염물질 정화를 위한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기로 했다. 지자체에 여러 차례에 걸쳐 신청을 한 끝에 겨우 허가를 받았지만 정수장 정화 등 일부 사업만 가능한 반쪽짜리였다. 허가범위 확대를 계속 건의해도 지자체는 폐기물 사업에 대한 지역민원이 있다며 3년이 넘게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담당 공무원도 해마다 바뀌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공무원들이 문제가 되는 규제를 스스로 발견해 없앨 수 있는 인센티브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허가하도록 명시된 것 이외에는 모두 금지하는 포지티브 규제도 신산업 태동을 가로막는다는 요인이었다. 신산업이 활발한 대부분의 국가는 금지한다고 명시된 것 이외 모든 것을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소비자 직접 의뢰 유전자검사(DTC·Direct-to-Consumer) 항목 규제가 대표적이다. 한국은 체지방, 탈모 등 12개 항목만 허용하다가 올해 들어 고혈압, 위암 등 13개 항목이 추가됐다. 반면 영국, 중국은 검사 항목을 따로 제한하지 않고 있고 미국(30여 개), 일본(300개)은 검사 항목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업체 D사는 위암 폐암 등 8대 암과 고혈압, 치매 등 12개 질환에 대한 DTC 키트를 개발하고도 규제에 막혀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했고 연구소는 일본과 싱가포르에 설립했다.

대한상의는 이와 함께 시장에 이미 진입한 사업자가 반대하면 신사업이 허용되지 않는 ‘기득권의 저항’도 문제점으로 지목했다. 차량공유업계를 극렬히 반대하는 택시업계나 원격의료를 반대하는 의료업계 등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배석준 기자 eul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