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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비 모아 마련한 돈인데” 대학생 등 60명 울린 전세 사기

입력 | 2019-05-24 03:00:00

신탁회사에 소유권 맡긴 건물주
임대차 계약 효력 없는데도 세입자 속이고 전세금 챙겨 잠적
피해액 30억… 돌려 받을 길 막막 “원룸 계약땐 신탁여부 확인해야”




직장인 김모 씨(33)는 2년 전 경기 용인시의 한 원룸 단지에 있는 ‘A빌라’에 전세로 입주했다. 자신이 모은 돈과 은행에서 대출 받은 4000만 원을 합쳐 전세금 5500만 원을 댔다. 김 씨는 전세 계약기간 만료를 앞둔 3월 집주인 박모 씨(72·여)에게 연락했다. 전세금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알아보니 원룸 건물은 이미 신탁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가 있었다.

김 씨는 지난달 결혼했다. 하지만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신혼집을 구하는 데 차질이 생겼다. 김 씨는 아내와 함께 5평짜리 원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김 씨는 박 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전세금 반환 청구소송도 제기한 상태다. 하지만 박 씨가 잠적한 상태여서 전세금을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5개 동, 120가구 규모의 A빌라 전세 입주자는 약 60명이다. 이들 대부분은 인근에 있는 명지대나 용인대에 재학 중인 학생이거나 서울 강남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다. 이들이 박 씨에게서 돌려받아야 할 전세금은 3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탁은 건물주가 은행 등에서 대출을 받는 조건으로 부동산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맡기는 것이다. 박 씨는 2012년 4월 한 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리면서 A빌라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맡겼다. 부동산 소유권을 신탁하게 되면 원래 소유자는 신탁회사와 저축은행의 허락 없이는 세입자 등을 상대로 임대차 계약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박 씨는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대학생과 20, 30대 직장인들을 상대로 전세 계약을 맺은 뒤 전세금을 챙겨 잠적했다.

김 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에 따르면 박 씨와 공인중개사들은 A빌라의 신탁 사실을 세입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다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세입 예정자가 신탁에 대해 물으면 “신탁회사가 전세 보증금을 한 번 더 보장해 주는 것이니까 믿고 계약해도 된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러나 신탁회사와 저축은행 측은 “박 씨에게 임대차 계약 권한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박 씨가 세입자와 맺은 계약은 효력이 없다”고 했다.

박 씨에게 피해를 당한 세입자 32명은 3일 용인 서부경찰서에 박 씨와 박 씨의 일을 봐준 공인중개사 3명을 사기와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박 씨를 고소한 피해자들 대부분은 아직도 A빌라에서 살고 있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면서 다른 곳에 집을 구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세금 40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한 직장인 김모 씨(27)는 내년 초로 잡았던 결혼마저 미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김 씨는 “신혼집을 못 구하니까 결혼식도 미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다시 돈을 모아야 하는데 암담하다”고 말했다. 올해 2월 서울 강남에 직장을 구한 또 다른 김모 씨(27)는 버스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박 씨한테서 전세금 6000만 원을 받지 못하면서 원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분쟁 전문인 최광석 변호사는 “원룸 등 신탁된 부동산에 전월세 계약을 맺을 때는 신탁회사가 신탁자(원소유주)의 임대차 계약에 동의했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며 “법원 등기소에 가서 신탁원부를 떼어보면 동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