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7화> 전북 임실
전북 임실군 오수초등학교 학생들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1919년 3월 10일 선배들(오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벌인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했다. 임실군 3·10만세운동 재현행사 위원회 제공
참석자들은 경성(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전국 규모의 3·1운동 계획 소식을 미리 듣고 ‘일제와의 새로운 전쟁’을 모의했다. 밤에 불을 밝히는 봉화책,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선언서책,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동원책 등 임무가 부여되고, 임실군 각 면을 책임지는 면책(面責)이 선정됐다(‘천도교임실교사’). 거사 일은 경성에서 보낸 독립선언서가 임실교구로 도착하는 시점으로 정해졌다. 참석자들은 운암면 국사봉, 청웅면 백련산, 덕치면 회문산, 삼계면 원통산, 성수면 성수산, 신덕면 치마산 등에서 봉화가 올려지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했다. 또 ‘3·1독립운동거사준비회’도 결성했다.
3월 2일 밤, 독립선언서가 천도교 전주대교구를 거쳐 운암면 임실교구에 전달됐다. 계획대로 임실군 각 면의 시장, 학교, 경찰서, 면사무소 등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이 붙여졌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위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일제 경찰이 동학혁명의 주무대이자 천도교 핵심 지도자들을 배출한 임실군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온 데다 핵심 인물인 한영태, 강계대 등을 일찌감치 체포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주로 압송된 한영태는 시위 가담자들을 자백하지 않아 3일간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한영태는 실수로라도 관련자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 혀를 깨물었고, 3월 9일 옷을 찢어 만든 줄로 목을 매 자결했다. 김영원 역시 옥중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가 그해 8월 26일 운명했다.
○ 보통학교 생도들의 만세운동
오수 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탑. 임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학생들의 기습시위에 놀란 일본인 교장과 주재소 순사들은 학생들을 설득하고 학부모를 강압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일경은 또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벌인 시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배후를 캐기 위한 탐문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생도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모르는 사람이 독립선언문을 주고 갔을 뿐”이라며 비밀을 사수했다.
이날 시위의 배후 주도자는 교사 이광수(1896∼1948)였다. 오수리와 인접 지역인 남원군 덕과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석기 덕과면장의 조카인 이광수는 이후에도 임실지역 청년회와 농민회를 통해 시위를 이끌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임실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임실읍 장날인 3월 12일 오전 10시경, 시장 한복판에서 2000여 명이 참가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지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곳곳에 뿌려졌다. 남원 등지에서 급히 차출된 일본 수비대와 헌병, 현지 경찰들이 무차별 총격으로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대는 흩어졌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날 밤 9시경 시위대 1000여 명이 읍내와 인근 산에 모여 동시다발적으로 만세를 부르는 게릴라식 운동을 펼쳤다. 횃불을 든 시위대는 산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이 들이닥치면 숨죽였다가 다시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일경이 읍내로 내려오면 다시 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밤을 새웠다(‘전북지역독립운동사’).
임실읍 만세운동이 시작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3·1동산에는 1978년 동아일보사가 지역 사회와 협력해 만든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안내한 임실군청 김철배 학예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세웠던 신사(神社) 터에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은 지역 사회의 반일 정서와도 관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 원동산의 만세 소리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신사로 사용하던 터에 세운 3·1운동 기념비. 1978년 동아일보사가 지역 건립위원회와 협력해 임실읍 3·1동산에 세운 것이다.
이기송은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발표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이에 나머지 유지들이 시위를 이끌었고, 군중은 삽시간에 800여 명 규모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이기송이 끌려간 주재소를 향해 거리행진을 벌이며 만세를 외쳤고, 그중 80여 명은 “이기송을 석방하라”며 주재소로 들이닥쳤다. 그 기세에 놀란 일본인 순사는 이기송을 바로 풀어주었다.
시위대는 다시 오수 주재소로 향했다. 이만의는 주재소를 접수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독립운동 참가자들을 풀어주었다. 이때 주재소에 있던 순사보 고택기가 총으로 위협했지만 이만의가 덤벼들어 총을 빼앗은 뒤 그에게도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일제 경찰들은 많은 군중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우리 백성들은 의기가 더욱 매서워져서 결사적으로 용진하므로 악한 적도 감히 칼을 뽑지 못하니, 이는 인자무적(仁者無敵)임을 가히 알게 된 바였다. 만세 소리는 산이 울고 골짜기가 이에 따르게 하여 백의의 빛깔은 어두운 밤을 낮과 같이 밝히는 듯했다.”(김병조, ‘독립운동사략’)
당시 오수는 일제에서 벗어난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비상연락을 받고 남원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과 임실경찰서 무장 병력이 나타나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삼계면 출신 허박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시위로 50여 명이 체포됐다. 특히 둔덕면의 이기송 등 둔덕 이씨 일가만 무려 16명이 투옥됐다.
이기송은 이후 무죄를 주장하며 고등법원에서 이같이 항변했다. “일한합병 이후 조선인은 모두 독립의 뜻이 있었으므로 만세를 외쳤다고 하여 어찌 범죄라고 할 수 있는가. … 우리 2천만 동포를 감옥 가운데 고통하게 함은 우리 동포의 단결심을 하루하루 강고하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내가 죽은 후에 내 자손이 있고 자손은 진보한다. 천만 년이라 해도 이 마음을 폐하지 못한다.”(‘이기송 외 7인 판결문’)
이기송은 또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조선을 허락한 일이 없다”라며 상고했으나 일제 법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시위주도자들에게 1∼7년형의 옥고를 치르게 했다.
100년 전 ‘임실의 독립선언’ 장소였던 원동산에는 현재 당시를 기억할 만한 게 거의 없다. 이곳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오수 의견비(義犬碑)와 개를 형상화한 동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주변에 누정과 관찰사 등의 선정비만 세워져 있다. 오수면의 3·1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오수면 오수리 산3)은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비탈진 곳에 ‘외롭게’ 서 있었다.
▼ 옥고 치른 지사 35명 ‘경착영춘계’ 만들어 비밀 독립운동 ▼
일제 탄압에도 독립염원 접지 않아… 광복후 계원 21명 국가유공자 추서
1921년 오수 만세운동 주도자 35명이 출옥해 만든 비밀계 조직인 경착영춘계의 강령 등을 기록한 ‘영춘계안’.
이들은 옥고 후에도 독립운동을 접지 않았다. 최근 이기송 선생의 후손 집에서 발견된 자료집 ‘영춘계안(迎春契案)’에 이런 사실이 수록돼 있다. 자료를 찾아낸 김철배 학예사는 “1921년 임실군 오수 지역에서 조직된 경착영춘계(耕鑿迎春契·밭을 갈면서 봄을 기다리는 계)는 오수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지사 35명이 출옥하면서 차례로 가입해 만든 비밀 독립운동단체”라고 설명했다. 8·15광복 후 계원 35명 가운데 21명이 순차적으로 국가유공자로 추서됐다.
‘영춘’이라는 이름에서도 독립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봄을 의미하는 ‘춘(春)’이 실은 조국 독립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며, 영춘은 조국 독립을 맞이하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영춘계원이었던 이성기 선생(1890∼?)이 1977년에 증언한 자료에 따르면, 영춘계는 보통계와 같은 모양을 갖췄지만 ‘춘(春)을 맞는다’는 뜻을 내포해 춘풍추국(春風秋菊)에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을 벌이는 비밀결사였다. 영춘계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4∼5년 만에 해산되고 만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영춘계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임실 지역의 ‘아픈’ 독립운동 가족사와 연결돼 있다. 이기송 가문은 만세운동 이후 여러 친지와 이웃들까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자 고향을 떠났고, 그 후손들은 이런 사실들을 모르고 살아왔다. 김철배 학예사는 “‘영춘계안’도 광주에서 사는 후손이 무언지 모르고 보관해 오다가 우연히 눈에 띈 것”이라고 밝혔다.
임실=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