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올해 초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현금이 아니라 두 배 값에 해당하는 쌀과 비료를 주겠다는 정부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의 대량 현금 대북 송금(벌크 캐시) 금지 조항을 우회하기 위해 ‘친절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인데, 북한은 식량 보다 현금을 원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통일부는 관련 보도를 부인했습니다.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전제조건인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자체가 무산된 상황입니다.
2007년 북한에 지원하는 식량이 선박에 실리는 모습. 동아일보DB
체면을 제외하더라도 북한 당국이 달러를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겹겹이 제재에 막혀 달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 북한경제 전문가들은 그 이면에 더 구체적인 이유를 찾아냈습니다. 제제로 들어오는 달러는 줄어들었지만, 경제의 현상유지를 위해서 전과 다름없이 달러를 쓰며 물건을 수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달러화(dollarization)가 심화된 북한 원의 대 달러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국이 시장에 달러를 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우선 수입을 위한 지출 문제입니다. 김석진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5월 22일 국민대학교 한반도미래연구원과 북한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일반 가정도 벌이가 줄어들면 일단 저금해 둔 돈을 써서 생활규모를 유지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지금 그동안 축장해놓은 달러를 풀면서 경제의 크기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국가적으로 외화소득이 줄어들고 있지만 외화지출은 유지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상품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겁니다. 벌어놓은 외화를 축내면서 당장의 경제적 고통을 모면하는 전략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2017년 중국에 17억30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하고 32억5000만 달러 어치를 수입했습니다. 심화된 제재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지난해에는 2억10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하는데 그친 반면, 수입은 22억2000만 달러 어치로 크게 줄이지 않았습니다(중국 해관 통계를 인용한 것으로 중국의 대 북한 원유 공급은 제외한 것입니다). 제재 속에서도 북한의 시장 물가가 크게 오르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들어온 수입품이 공급측면을 버텨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현재 쌀값은 1kg당 5000 북한 원 수준입니다.
현재 달러 당 8000 북한 원에 유지되고 있는 환율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위원은 “북한으로 유입된 외화의 대부분은 북한 돈으로 환전되지 않기 때문에 시장 환전은 소규모 주변적 거래에 불과하다”며 “외화 수급보다는 북한의 통화량이 시장 환율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현재 북한 통화량도 관리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통화량이 유지되기 때문에 달러 환율도 관리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올해 2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 인플레이션에 관한 연구: 시장가격 변동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연욱 NH투자증권 부장은 “북한 원으로 달러를 사려는 사람에게도 정부가 출혈을 감수하고 8000원대라는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환율 방어에 나서는 것처럼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달러를 더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북한의 지폐. 동아일보DB
현재 북한은 경제의 외형을 최대한 제재 이전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족한 달러를 풀어 쓰고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지만 여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수입이 줄어든 가정이 전처럼 지출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통장잔고가 바닥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지 않는 상태에서 외화지출을 계속한다면 1997년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외환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김 박사는 올해 장형수 교수와 쓴 다른 논문에서 2018년 말 북한의 외화보유액을 25~58억 달러로 추정했습니다.2016년까지 증가세였다가 유엔 대북 제재가 강화된 2017년부터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