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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된 ‘장자연 리스트’ 수사[오늘과 내일/이명건]

입력 | 2019-05-29 03:00:00

기록 누락 등 절차 허술… 10년 의혹
김학의 결국 구속… 수사는 의지 문제




이명건 사회부장

10년 전 오늘.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이 열렸다. 그 한 달 전 검찰 조사를 받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6일 만이었다. 그 여파로 6월 초 검찰총장이 퇴임했고, 7월 중순 후임 총장 후보자가 도덕성 문제로 사퇴했다. 이후 한 달 동안 총장 직무대행 체제가 이어졌다.

바로 그때 ‘장자연 리스트’ 사건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종결됐다. 서거 후폭풍에 검찰 수뇌부가 넋 나간 시기였다. 앞서 같은 해 3월 장 씨가 숨진 직후 경찰 수사팀이 출범했다. 검찰의 노 전 대통령 수사가 본격화한 시점도 3월이다. 4개월 뒤 수원지검 성남지청이 경기 분당경찰서에서 사건을 넘겨받았다. 경찰은 술자리 강요 등의 혐의를 받던 장 씨 소속사 전 대표 김모 씨 등 6명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또 장 씨의 전 매니저 유모 씨에 대해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런데 40일 후 검찰은 김 씨와 유 씨만 불구속 기소하고 수사를 끝냈다. 다른 수사 대상 12명은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공교롭게 그 다음 날 신임 검찰총장이 취임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 수사에 몰두했다. 그러다 서거로 난리가 났다. 일반 사건에 관심을 가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연예인의 안타까운 죽음 정도로 생각했다.”

당시 검찰 요직을 지낸 법조인은 이렇게 강조했다. 장자연 리스트 수사를 왜곡할 이유도 없었고, 여건도 아니었다는 의미다. 정말 그랬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수사는 왜 망가졌을까.

검찰 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장자연 리스트 수사에서 △압수수색 부실 △통화 명세 등 기록 누락 △녹취록 등 증거 부재가 확인됐다. 경찰은 장 씨 사망 직후 1차 압수수색에서 장 씨의 다이어리 등 주요 증거를 확보하지 않았다. 검찰은 장 씨의 1년 치 통화 명세 등 주요 기록을 보관하도록 경찰을 지휘하지 않았다.

수사는 절차다. 압수수색, 진술 확보, 기록 분석 등의 절차가 차곡차곡 쌓인 게 수사 결과다. 절차가 허술하면 결과가 의심받는다. 그래서 장자연 리스트 수사가 10년 내내 의혹의 수렁에서 허우적댄 것이다.

10년 전이라고 검찰과 경찰이 절차의 엄중함을 몰랐을까. 당시 담당 부장검사는 최근 본보 기자에게 “재직 시 일은 얘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검찰도 경찰도 기록 및 증거 누락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모르쇠로 일관한다. ‘고의’를 빼놓고는 원인 분석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의가 전제되면 그림이 그려진다. 전직 대통령 수사와 서거의 혼란한 틈을 탄 외압과 회유가 통했다면 말이다. 방관은 종종 왜곡을 부추긴다.

그림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수사에 비춰 보면 보다 선명해진다. 10년 전 검찰의 장자연 리스트 수사 관계자는 “핵심 참고인들 진술에 일관성과 신빙성이 없어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고 했다. 여기서 ‘참고인’을 ‘피해자’로 대체하면 6년 전 검찰이 김 전 차관의 성접대 혐의가 없다면서 밝힌 사유와 똑같다. 하지만 김 전 차관은 최근 검찰 재수사로 구속됐다. 결국 성접대가 뇌물수수 혐의에 포함됐다.

반면 장자연 리스트 사건은 재수사가 불가능하다. 부실 수사 논란도 수사로 규명할 수 없다. 모두 공소시효가 만료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체를 규명할 방도는 있다. 과거사위 권고로 장 씨 소속사 대표였던 김 씨의 위증 혐의를 검찰이 수사하게 됐기 때문이다. 위증 여부 판단의 필수 조건이 실체 규명이다. 김 씨는 이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다.

수사는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6년이나 걸렸지만 끝내 김 전 차관을 구속하지 않았나. 장자연 리스트 수사는 이제 시작이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