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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개 공공기관 이전 실험 6년… 균형발전 ‘절반의 성공’[논설위원 현장칼럼/신연수]

입력 | 2019-05-29 03:00:00

16곳 옮겨온 나주혁신도시 가보니




하늘에서 바라본 나주혁신도시. 2013년 혁신도시 설립 이전 허허벌판(오른쪽 사진)과 2019년 5월 한전 본사에서 내려다본 모습. 나주혁신도시에는 현재 16개 공공기관이 입주해 있다. 나주시 제공·나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신연수 논설위원

2005년 ‘혁신도시 추진’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수도권에 있는 153개 공공기관을 전국의 시골 10곳과 세종 오송 등으로 옮기는 대대적인 실험이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실제로 가능할까? 공공기관의 비효율만 낳고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2013년 처음 공공기관 이전이 시작된 뒤 6년이 흘렀다. 혁신도시 실험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남의 나주 혁신도시를 찾았다.

20일 서울 용산역에서 KTX로 2시간 걸려 도착한 나주역은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나주역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마을의 기차역처럼 작고 소박했다. 2014년 말 16개 공공기관이 이전한 지 5년이 지난 지금에야 확장 공사를 하는 것이 의아했는데, 돈이 많이 드는 만큼 지방자치단체가 조금씩 돈을 모아서 이제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주역이 있는 구도심에서 혁신도시까지는 자동차로 20분. 근처에 가까이 가자 31층의 높은 빌딩이 눈에 띄었다. 16개 공공기관 가운데 가장 큰 한국전력공사 본사 건물이다. 오랫동안 개발이 없었던 전남도와 광주광역시 전체를 통틀어 이 빌딩이 가장 높다고 한다. 혁신도시가 만들어지기 전인 2013년 말 이곳의 항공사진과 지금의 항공사진을 비교해보니 차이가 확연하다.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지금은 고급 빌딩과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전남도 전체 인구는 2014년 말 193만4000여 명에서 작년 말 191만6000여 명으로 4년간 2만 명 가까이 줄었지만, 그사이 나주시는 혁신도시 덕분에 9만2600여 명에서 11만6000여 명으로 2만 명 이상 늘었다. 지방세 수입은 연간 9억 원에서 135억 원으로 15배로 폭증했다. 전남도와 나주 지역 주민들이야 공공기관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정작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어떨까?

교육-문화시설 부족해 아직은 불편

필자가 만난 공공기관의 팀장 이상 간부들은 대부분 아직도 집이 서울이었다. KTX로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을 동반해 이사를 온 사람은 38.9%에 그친다. 중·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임직원들의 이주율이 특히 낮다. 교육과 문화 인프라가 워낙 취약해서 그렇다.

반면 아직 어린 자녀들을 둔 직원들은 만족도가 높았다. 한전 예산팀 조선영 차장은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을 데리고 이주했다. 남편은 같은 한전 직원인데 다른 지역에 근무해 주말 부부라고 한다. 조 차장은 “2014년 말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소아과도 없어서 아픈 아이를 데리고 광주까지 갔는데 지금은 7, 8곳이 넘는다”고 했다. 처음엔 주말에 장볼 곳도 마땅치 않아 광주에 갔는데 지금은 나주의 마트나 시장을 이용한다고 했다. 오히려 서울에 근무할 때는 출퇴근 시간만 도합 2시간이 넘었는데 여기서는 걸어서 5분이라 생활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엔 스타벅스 커피숍이 생기고 6관짜리 CGV 멀티플렉스도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종합병원이 없어 밤중에 급히 응급실에 가려면 대도시로 나가야 한다.

한전 홍보팀의 홍지현 차장은 “기자들이 있는 세종시까지 자주 가야 하지만 어차피 서울에서 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한전 직원 중에서도 해외사업 분야 임직원은 국제공항이 있는 인천까지 자주 올라와서 길에 시간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주가 수도권에서 워낙 멀다보니 거리 때문에 생기는 비효율성이다. 홍 차장의 부인은 서울에 있을 때 회사를 다녔는데 나주로 이사하면서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전업주부가 됐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될 나이가 되면 교육여건이 좋지 않아 지금의 선배들처럼 불안하지 않을까? 홍 차장과 조 차장은 “불안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요즘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이 잘 안 되는데, 혁신도시 공공기관들이 지방대 출신을 뽑는 비율이 작년 18%에서 내년엔 30%로 늘어날 예정이어서 오히려 지방에서 취업할 기회가 점점 많아지리라는 것이다.

나주 혁신도시에 아직 중·고등학교와 학원들이 거의 없다보니 근처 광주 지역이 커지는 연쇄반응을 낳았다. 나주와 광주를 잇는 광주 남구 봉선동과 진월동은 최근 2∼3년간 학원들이 몰리고 아파트 가격이 2배로 뛰어올라 ‘광주의 대치동’이라 불린다. 봉선동 안에서도 남과 북이 달라서 서울의 강남 강북처럼 봉남 봉북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나주산단中企 인력 구하기 어려워

혁신도시가 정착하려면 민간 기업들이 많이 이주하거나 새로 생겨서 일자리가 늘어나야 한다. 한전과 전남도, 광주시는 2014년부터 나주와 근처 지역에 500개 에너지신산업 기업을 유치해 에너지밸리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혁신도시에 투자하겠다고 협약을 맺은 기업은 360개지만 실제로 투자한 기업은 중소기업 206개사다. A대기업은 광주에 땅까지 사놓았지만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며 실제 이전은 아직 하지 않았다.

나주혁신산업단지에 1호로 입주한 보성파워텍은 송전 배전에 들어가는 변압기와 PCS 등을 만들어 한전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이다. 충주가 본사인 이 회사는 나주공장을 만든 뒤 세금 감면과 이 지역 중소기업 물량 10∼20% 우선구매 정책 등으로 매출과 수익성이 좋아졌다. 재생에너지에서 각광받는 ESS 쪽으로 사업을 더 확장하기 위해 충주에 있는 연구소를 옮겨오려고 하는데 직원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완성 보성파워텍 부회장은 “신상품을 개발하려면 석·박사들이 일하는 연구소가 나주로 내려와야 하는데 직원들의 반대가 워낙 심하고 신규 인력을 채용하기도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나주가 수도권에서 워낙 멀다보니 고급 인력 확보가 어렵고, 인재 확보가 어려우니 관련 기업들도 내려오지 않는 악순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권이 몇 차례 바뀌면서 주춤했던 혁신도시는 지난해 2월 정부가 ‘혁신도시 시즌2’를 내놓으면서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2017년까지가 터를 닦고 공공기관을 이전하는 시즌1이었다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기업들의 입지여건을 개선하고 산학연 협력체계를 구축하며 보육 문화 의료 등 주거환경을 확충해 한 단계 더 도약시키겠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전국 10개 혁신도시들을 각 지역 발전의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공공기관을 이전한 게 한국이 처음은 아니다. 영국 프랑스 같은 유럽 여러 나라들도 수도권 집중을 막거나 지역의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1960년대부터 대대적으로 공공기관들을 이전했다.

‘혁신도시 시즌2’ 기대해도 될까

선진국들을 여행할 때마다 늘 부러웠다. 푸르른 자연과 어우러진 나지막한 건물들, 쾌적한 환경에서 태어나 일하며 평생을 고향에서 사는 사람들, 도시는 너무 붐비지 않고 시골은 도시보다 더 풍요로워 보이는…. 이런 것이 진정 선진국이 아닐까 생각했다.

공공기관들은 최근까지 계속 이사를 하는 중이다. 길어야 4∼5년 전 공공기관이 이전하기 시작했으니 혁신도시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 나주는 만 4년 반 동안 빠르게 성장했다. 그나마 나주는 전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곳으로 꼽히지만 앞으로의 과제가 더 많다. 다른 지역들은 기업을 유치하고 살 만한 곳으로 가꾸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공공기관 이전과 혁신도시를 도로 무를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과제가 민간 기업들을 유치하고 산학연 클러스터가 활성화돼 지속가능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더불어 살기 좋은 주거환경을 갖춰가는 일이다. 이런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한전은 회사 내에 기업 유치와 지자체 협력 등을 전담하는 상생발전본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혁신도시가 자리를 잡으려면, 그래서 각 지역 발전의 핵심이 되려면 중앙정부가 종합적인 지원을 해줘야 한다. 무엇보다 전남도와 광주시, 나주시 등 지자체 스스로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더 많이 고민하고 더 적극성을 보여야 할 것 같다. 앞으로 20년쯤 지나면 수도권 인구는 좀 줄어들고, 전국의 각 시도는 더 살고 싶은 곳이 되는 날이 오려나.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