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란(36)은 한사코 손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거듭된 요청에 그는 수줍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자의 손은 굳은살과 물집으로 가득했다. ‘역도 여제’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 장미란은 매일 하루 평균 5만 kg의 쇳덩이를 들었다 놨다. 굳은살과 물집은 그가 역도에 쏟은 피와 땀의 흔적이었다. 여자 골프 선수들 중에서도 손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선수들이 있다. 작은 골프공을 향해 매일 수백 번씩 채를 휘두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손이 거칠어진다. 터진 물집 위에 새살이 돋고, 새살은 다시 터지기를 반복한다. 한때 여자 골프 세계랭킹 1위에 올랐던 신지애(31)의 두 손도 그렇다. 하지만 그는 “예전에 비해 많이 고와졌다”며 웃었다. 그런 신지애가 몇 해 전 장미란을 처음 만난 뒤 크게 반성했다고 한다. “아, 난 아직 한참 멀었구나.” 울퉁불퉁하지만 아름다운 손을 가진 둘은 이후 자매처럼 가까워졌다.
몇 해 전 흔들리던 신지애를 바로잡아 준 사람 역시 장미란이었다. 2013년 즈음 신지애는 자신의 인생에 큰 회의를 느꼈다. 골프 한길만 보고 달려온 그는 우승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더 이상 기쁘지 않았다. 왜 계속 골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장미란은 신지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네가 잘하는 일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방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2013시즌 후 주 무대를 미국에서 일본으로 옮긴 뒤 예전의 쾌활함을 되찾았다. 지금은 ‘행복한 골프’ 전도사가 됐다. 열정을 되찾은 신지애는 올해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서 랭킹, 상금, 평균타수 등 각 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에도 출전한다.
30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시작되는 US여자오픈에 출전하는 신지애는 대회장으로 가기 며칠 전 미국 애틀랜타를 들렀다. 미국 유학 중인 장미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장미란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용인대 교수로 임용됐다. 휴직계를 내고 2017년부터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스포츠행정을 공부하고 있다. 둘은 이틀을 붙어 지냈다. 아침저녁으로 공원을 뛰고, 낮에는 피트니스센터에서 함께 운동을 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여전히 승부의 세계에 사는 신지애에게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신지애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여전히 전 언니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함이 많네요. 많이 배웁니다”라고 썼다.
장미란은 “공부가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쉽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하는 공부라 하루하루가 즐겁다. 역도를 할 때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건 없었다. 매일 정해진 양을 꾸준히 채워가다 보니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었다. 공부도 그렇게 채워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농담처럼 “다만 내 분신과도 같았던 물집과 굳은살이 사라진 게 아쉽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마음의 근육이 생겨났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장미란의 모습은 신지애에겐 또 하나의 배울 거리였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