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면담하는 북한 대표단. 오른쪽부터 통일전선부장에서 해임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지방으로 추방된 박철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수용소에 끌려간 김성혜 통전부 실장,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숙청된 인사 중에는 남쪽에도 잘 알려진 김성혜 통전부 통일전선책략실장(54)이 포함돼 있다. 김 실장은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직후 억류돼 취조를 받았고, 얼마 전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하노이 회담 실무자들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올 때 “설마 미국과 마주 앉았던 사람들을 숙청하겠느냐”는 반론이 있었지만 예측은 현실이 됐다.
김성혜는 지난해에 부각된 인물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가하러 내려온 김여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북-미 협상에 깊숙이 개입했다. 김영철 통전부장과 함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만났고 1, 2차 북-미 회담 준비 작업도 주도했다.
반면 함께 북-미 협상에 참가했던 한 살 위의 여성 실세 최선희 외무성 북미국장은 하노이 회담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어 비교가 된다. 최선희는 부상(차관급)으로 승진했고 장관들도 하기 어려운 국무위원회 위원에 올랐다.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위원도 됐다. 하노이 회담 전날 김정은이 멜리아 호텔에서 가진 실무회의의 원탁에는 김성혜와 최선희를 포함해 단 4명만 앉았다. 결과를 보면 최선희의 분석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김성혜의 분석은 격노를 산 셈이 됐다.
김성혜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던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최근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추방된 것으로 전해진다.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발언으로 화제가 됐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는데, 지금 취조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미·대남 외교를 총괄해온 김영철도 통전부장에서 해임돼 허울뿐인 노동당 부위원장으로 밀려나 미래를 알 수 없게 됐다. 북-미 협상에 뛰어든 통전부 라인의 ‘김영철 사단’이 모두 전멸한 셈이다. “대남 업무를 맡은 통전부가 분수에 맞지 않게 외무성의 일인 북-미 회담은 왜 가로챘을까”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결국 그 업보를 받았다.
숙청 바람은 통전부에만 불지 않았다. 1993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공사로 시작해 유엔 차석대사를 두 번씩이나 지낸 20여 년 경력의 최고 미국 전문가 한성렬 외무성 부상(65)은 총살됐다고 한다. 그를 포함해 소문이 무성했던 외무성 간부 4명의 처형설은 사실인 듯하다. 다만 4명 모두 해외에서 활동한 인물들이지만 외무성 소속이 아닌 사람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의 숙청 상황을 전해준 북한 내부 소식통은 과거에도 고위층의 숙청 소식들을 정부 발표보다 훨씬 이전에 정확히 알려주었다. 감옥 간 사람도 하루 만에 꺼내놓을 수 있는 북한인지라 숙청 보도는 부담스럽지만 이 소식통은 신뢰할 만하다.
통전부에 몰아친 피바람은 북한과의 접촉을 학수고대하는 한국 민간단체들에는 악재다. 에이스들이 숙청된 통전부는 최대한 몸을 사릴 것이다.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남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통전부 고위급 중 무사히 은퇴한 사람은 거의 없다. 거긴 죽음의 자리다. 이 칼럼을 북에서 읽게 될 통전부 간부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나는 아닐 것이라고 제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