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서도명창 박월정
서도소리 명창 박월정(왼쪽)과 그의 창작판소리 음반 ‘항우와 우희’. 김문성 씨 제공
김문성 국악평론가
1931년 9월 개성 최초의 공연장인 개성좌에서 판소리 김초향, 박록주, 서도소리 박월정(朴月庭·예명 박금홍) 세 여류 명창의 합동 공연이 열립니다. 개성은 서도소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지역으로, 박월정의 서도소리를 기대한 팬들이 개성좌를 가득 메웠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면서 좌중은 혼란에 빠집니다. 수심가나 배따라기 같은 서도소리 대신 박월정은 판소리 목으로 심청가와 춘향가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니리를 연극 톤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 공연은 서울 공회당 무대에도 오릅니다. 조선비행학교 교장 신용인이 비행기를 서울 상공에 띄워 공연 전단지를 뿌릴 만큼 핫한 공연이었습니다. 박월정은 이날도 서도소리 대신 판소리를 불렀습니다. 서도소리꾼이 다른 장르를 주 전공 삼아 활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박월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933년부터는 조선음률협회의 후원을 받아 창작판소리 공연 및 음반 제작에도 참여합니다. 이때 발표한 ‘단종애곡’이나 ‘항우와 우희’는 창작 판소리사 및 연극사에서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박월정은 훗날 그녀의 남편이자 일제강점기 신극운동 전개에 기여했던 이기세의 권유로 1922년 예술협회 소속 예술좌에 가입하면서 연극과 인연을 맺습니다. 연극과 판소리를 결합해 대중화하는 작업을 시도합니다. 아니리는 연극톤으로, 창은 정통 방식으로 노래하는 그녀만의 소리가 완성됩니다. 그가 판소리계의 날카로운 비판을 정면으로 맞고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인터뷰했던 것처럼 ‘모든 소리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월정의 판소리는 11월 중견소리꾼들에 의해 재현될 예정입니다.
김문성 국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