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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의 무비홀릭]남편이 남의 편인 이유

입력 | 2019-05-31 03:00:00

영화 ‘미성년’. 쇼박스 제공


“성욕이야, 사랑이야?”

지난달 개봉해 겨우 30만 관객이 보고 망한, 놀랍도록 잘 만든 영화 ‘미성년’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우등생인 고1 딸과 작은 회사 이사인 남편(김윤석)의 뒷바라지만 묵묵히 해온 전업주부(염정아)는 어느 날 남편이 오리고깃집 여사장과 바람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임신까지 한 여사장은 막 아이를 낳아 키울 참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아내는 “한 번만 용서해 달라. 실수였다”는 남편에게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다.

자, 성욕일까, 사랑일까? 남편은 고민한다. 성욕은 분명한데 사랑인지 아닌지는 헷갈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욕이자 사랑인데 이걸 아내에게 실토했다간 아내가 돌아버릴 수 있어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도대체 남자한테 성욕과 사랑의 구분이 가능하겠는가. 자유와 평화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성욕과 사랑의 양 날개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영화 속 남편은 급기야 이런 궁핍한 답을 내놓는다. “미안하다.”

남자는 이래서 하등동물이다. 영화 속 아내의 ‘출제 의도’는 성욕과 사랑 중 하나를 고르란 말이 아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안 믿는다. 넌 쓰레기다. 하지만 내 속이 이렇게 끓어오르니 뭐라도 터진 입으로 내뱉어 보라’는 뜻인 것이다.

영화는 놀랍도록 심오한 여성들의 마음세계를 비춘다. 김윤석의 딸과 오리고깃집 여사장의 딸은 같은 학교 동급생인데, 자신들의 아빠와 엄마가 불륜관계임을 알게 된 두 여고생은 처음엔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갖지만 이내 동질감으로 변해간다. 그러곤 조산이 되어 인큐베이터에 있는 손바닥만 한 남동생을 보면서 ‘이 소중한 생명을 팔푼이 같은 부모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내가 키우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염정아는, 이미 오래전 노름에 미쳐 집을 뛰쳐나간 한 놈팡이에게 상처받고 살아온 오리고깃집 여사장과 그녀의 딸에게도 동병상련을 느낀다. 자신들은 적이 아니라, 수컷들에 의해 고통 받는 희생자들이니 말이다.

아, 움직이는 여성들의 깊은 내면을 마치 농담 한마디 툭 던지는 투로 단출하고도 완벽하게 전하는 이 탁월한 영화가, 수컷들의 약육강식을 그린 영화 ‘황해’에서 전대미문의 살인마로 나온 ‘마초’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이란 사실을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제목인 미성년은 두 여고생이 아니라, 영원히 철들지 않는 영화 속 남자들이었던 것이다.

여성성은 위대하다. 내가 섹스할 수 있는 대상을 뺀 대부분의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남자와 달리 여성은 진짜 내 편과 진짜 남의 편(이걸 줄여서 ‘남편’이라 한다)을 구별할 줄 아는 본능적 능력을 가졌다. 적대감보단 동질감으로 세상을 보려 하는 여성이기에, 신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귀한 능력을 여성에게 선물한 것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열일곱 살 이탈리아 소년과 스물넷 미국 청년의 풋사랑을 그린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에 특히 여성 관객이 열광하고 공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건 단지 동성애가 아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우리가 ‘자기야’라고 부르듯 자기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는 관계야말로 여성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넌 또 다른 나’의 경지, 즉 진짜 사랑이 아닐까 말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걸캅스’라는 한국 영화를 둘러싸고 최근 인터넷에서 벌어진 페미니즘 논쟁이야말로 ‘찌질이’ 같은 남자들의 민낯을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버닝썬’ 사건과 놀랍도록 유사한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는 클럽에 놀러온 여대생들의 코에 ‘매직 퍼퓸’이란 신종 마약을 뿌려 마취시킨 뒤 강간하면서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 회원 모집을 하고 돈을 버는 쓰레기 같은 수컷들이 등장한다. 남자 형사들이 “이런 사건은 실적이 별로 되지 않는다”며 심드렁해하자 보다 못한 전현직 열혈 여형사 둘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영화에서 주인공(라미란)은 “우연히 나쁜 놈한테 당한 것뿐인데, 여자들은 왜 그걸 자기 탓이라며 자책하는 거야? 그게 왜 여자들 탓인데?”라며 격분하는데, 이 영화를 두고 일부 남자 누리꾼들은 “남자 경찰의 무능함만 부각시킨 ‘페미코인’(페미니즘을 상업적으로 이용함을 뜻하는 신조어) 영화”라며 ‘평점 테러’를 퍼부은 것이다.

아, 어쩌면 남자들은 여성들의 마음을 이토록 모른단 말인가. 여성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기에 이런 영화까지 만들어졌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더욱 놀란 것은, 서울 한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주말 조조 상영으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장면 때문이다. 연인으로 보이는 20대 초반 남녀가 이 영화를 본 뒤 나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갑자기 남자가 장난을 친다면서 “치익”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여자 친구의 코끝에다 영화 속 신종 마약을 뿌리는 듯한 흉내를 내고는 낄낄 웃는 것이 아닌가. 영화 내용에 여자 친구의 기분이 얼마나 더러워진 상태인가를 티끌만큼도 헤아리지 못한 바보천치 같은 짓거리였다. 오만상이 찌그러진 여자 친구는 내가 옆에 서있는데도 순간적으로 이런 짧고도 강렬한 멘트를 남자 친구에게 날려 주었다. “에이, 씨×.” 여성이여, 영원하라!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