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만 귀환 장병의 안타까운 죽음… 대통령은 조문도, 영결식 참석도 안해 국가 위해 희생한 제복 영웅들을 왜 우리는 좀 더 예우하지 못할까
이기홍 논설실장
얼마나 덥고 험한 바다였을지, 그곳에서의 파병 근무는 얼마나 고됐을지, 제대를 한 달 남겨놓고 고국 항구에 들어올 때 미래에 대한 꿈에 얼마나 부풀었을지….
그런 생각들이 떠나지 않아 며칠 뉴스를 보고 검색을 해봤지만, 막상 고 최종근 하사의 스물두살 삶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검색 뉴스들은 그의 죽음을 모독한 남혐 성향 인터넷 사이트 논란과 영결식 행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드님을 안장할 때 유골함에 가족사진을 함께 넣으셨더군요.
“아들을 어둡고 무서운 곳으로 혼자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너 옆에 아빠 엄마 여동생이 항상 함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24일 아침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내 부두에서 청해부대 소속 최영함이 다가와 정박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부두엔 환영 나온 가족 800여 명이 있었다. 이제 곧 선상 행사가 끝나면 아들이 배에서 내려오겠지… 설레며 기다리는데 폭발음이 들렸다. 앰뷸런스가 달려왔다. 부두의 가족들은 다들 불안감에 발을 굴렀다. 옆의 아내도 “불길하다”고 중얼거렸다.
앰뷸런스가 3 대째 도착하고 다친 수병들이 내려왔다. 그런데 들것에 실린 수병을 앰뷸런스에 태우던 군 관계자가 “최종근”이라고 아들 이름을 크게 불렀다. 가족을 찾는 것이었다. 아내는 거의 실신했고, 최 씨만 앰뷸런스에 올랐다. 아들에게 눈을 떠보라 했지만 응급실 의사는 심장이 멎었다고 말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40도를 넘는 고온, 계절풍을 타고 오는 높은 파도 속에 300명이 4300t 배 안에서 견뎌야 하는 6개월. 관 크기의 공간에서 잠을 자고, ‘아덴만 여명작전’으로 잘 알려졌듯 목숨을 건 해상작전이 언제 전개될지 모르는 날들이지만, 갑판병 아들은 위성통화에서 한 번도 힘들다거나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집에 가면 아빠하고 맥주에 교촌치킨 먹고 푹 자고 싶다는 말에서 고된 생활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 아들을 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에도 그는 단 한번도 누구의 멱살을 잡거나 욕을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통화 중간 중간 슬픔에 목이 메는 듯 말을 멈췄지만, 조용한 목소리를 이어가던 그는 딱 한 번 단호히 분노를 표출했다.
최 하사 사고를 모욕한 인터넷 집단에 대해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안 받으려 하지만 강한 사람이 못 되는지 상처를 받았습니다. 상처 치유는 힘들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갖고 남의 죽음을 모독해선 안 된다는 걸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야 합니다.”
필자가 미국 주재원 시절 목도했던 숱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숨진 장병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아무리 한밤중이어도 대통령이 공항에 나가 거수경례로 맞이하던 장면들, 연방 예산과 인력·펀딩 배분 때 보훈처(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를 최우선으로 하는 게 당연한 문화, 비행기를 탈 때 흔히 듣는 “군인 먼저 탑승하세요”라는 안내방송….
사회가 제복을 최고로 예우해주는 만큼 공복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강하며 윤리 의무를 어겼을 때 받는 페널티도 매우 엄하다. 군복이 무색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진보 평화운동가로 혼동하는 듯한 국방관료들, 법복이 부끄러운 일부 이념 판사들, 정치권에 외교 기밀을 알려주는 외교관 등으로 시끄러운 우리 현실과는 차이가 크다.
최 하사 부친과의 대화는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한국여성이 포함된 인질구출작전 중 숨진 프랑스 특공대원 2명의 영결식(14일 파리)으로 이어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영결식장에서 유족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슬픔을 함께 나눴다. 27일 최 하사 영결식에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은 없었다.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와주셨으면 힘이 됐을 거라는 생각은 어느 부모라도 하겠지요. 군인 소방 경찰 이런 분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이라도 남을 위해 희생해 유명을 달리했을 때 국가가 최고로 예우해 떠나보내 준다면 유가족의 마음도 조금은 더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