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의 향기]“평양에서 만난 북한인도 사람은 사람이더라”

입력 | 2019-06-01 03:00:00

◇시-유 어게인 인 평양/트래비스 제퍼슨 지음·최은경 옮김/480쪽·1만8000원·메디치




지난해 10월 5일 평양 시민들이 만수대 창작사 정문 앞을 지나가는 모습. 북한은 꼭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나라다. 정보도 부족하지만 정서나 가치관도 다른 국가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어떤 삶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건 그곳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함부로 동조할 수 없는 만큼 입맛대로 재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아일보DB

“5년이 지난 뒤에는 첫발을 디뎠던 곳과 겉보기에 매우 다른 어딘가에 도착했다. 길을 잃었을 때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그 끝이 어디든, 당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미국인은 ‘돌+아이’다. 비하할 맘은 없지만 일반적이진 않다. 세계를 방랑하던 소설가로서 북한에 흥미를 느낄 수야 있다. 근데 시기가 2016년이었다. 그해 1월, 오토 웜비어(1994∼2017)가 억류된 그때 말이다. 그런데 평양으로 1개월 어학연수를 간다고? 친동생이면 머리끄덩이 잡고 다리몽둥이를….

어쨌건 그는 갔다. “집착은 사람을 이상한 길로 돌아가게 만들고 그렇게 돌아간 길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짓기도 한다”는 저자 말마따나, 이 비정상적인 관심은 세상 누구도 하기 힘든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실은 2012년부터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꽤 친숙한 편이긴 했지만, 관광과 체류는 또 다르니까.

익숙하다고 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평양에서 ‘외계인’이다. 시내를 걸어가면 모두가 쳐다보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하지 말란 것도, 가면 안 되는 곳도 많다. 수업 때 한글 발음을 익히려고 동영상을 찍었는데, 뒤쪽에 걸린 김정일 초상화가 일부 잘렸다는 이유로 삭제 요구를 받는 나라. 저자가 자책하자 함께 수업 듣던 외국인 동료는 이렇게 대꾸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항상 이걸 기억해요. 그들이 이상한 겁니다. 우린 아니에요.”

바로 이 지점이, 어쩌면 ‘시-유 어게인…’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리라. 저자는 뭔가를 고발하거나 혹은 옹호하려고 이 책을 쓴 게 아니다. 정치나 도덕이란 잣대를 들이밀려고 평양에 가지 않았다.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가가 보고 싶어서다. 서로 너무나 다른, 심지어 상대가 ‘적국(敵國)’이기까지 한 그는 어디까지 소통할 수 있을까. 판문점에서 만난 한 젊은 병사는 말한다. “미국인도 사람은 사람이네요.” 딱 그대로 저자는 그 말을 돌려주고 싶은 게다.

스스로를 “북한 최초의 미국인 유학생”이라 부르는 저자 트래비스 제퍼슨. 메디치 제공

물론 이 책은 한계도 자명하다. 웬만한 자유국가도 겨우 한 달로 무슨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그런데 어딜 가든 감시원(또는 안내원)이 달라붙는 체제 아래서 뭐 대단한 속내를 파헤칠 수 있겠나. 심지어 저자가 만난 대다수는 ‘평양 시민’이다. 북한에서도 선택받은 이들만 본 셈인데, 아무래도 편향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허점이 이 책의 매력을 깡그리 없애진 못한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었다 해도, 본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났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떤 공감과 이해가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실제로도 이 책이 들려주는 체험은 의외로 놀라운 구석이 많다. 게다가 다녀온 뒤로 짐작되지만, 저자는 아주 열심히 한반도의 정세와 역사를 공부했다. 그 노력은 동의 여부를 떠나서 함부로 폄하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평양은 “매일 아침 온통 안개로 뒤덮인다”. “마치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어 마법의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그 도시는 언제쯤이면 햇살이 비치며 환하게 실체를 드러내려나. 아니면 더 짙은 연무와 어둠 속으로 윤곽조차 감춰버릴까. 저자도 우리도 답은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그곳엔 사람이 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