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북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불과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처형당했다. “나는 죽음도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는 조국 해방의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만주 뤼순(旅順) 감옥에서 하얀 명주로 된 한복을 입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안 의사는 자신의 희생이 조국 해방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일제가 안 의사를 급하게 처형한 것은 그의 의거가 일파만파 퍼져 나가 국제여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안 의사의 의거는 20세기 초 제국주의 식민지배자들에게는 큰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줬고, 피압박 민족들에는 해방의 등불을 비추는 소식이었다. 최근 공개된 당시의 극동지역 러시아 신문들은 안 의사가 체포된 후 신문에서부터 사형 집행까지의 종적을 자세히 보도해 안 의사 의거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보여준다.
▷안 의사는 사형 직전 자신의 뼈를 중국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국권을 되찾으면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9년이 됐는데도 우리는 그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가 묻혀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가기록원이 발굴해 공개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 신문의 1910년 4월 21일자에는 안 의사가 사형 직후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 교도소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간 안 의사 유해 매장지는 뤼순 교도소 내 수인(囚人)묘지로 추정돼 왔는데, 다롄 시내의 민간인 공동묘지에 묻혔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러시아 신문 기사는 ‘(일본) 아사히신문의 특파원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인용 형태인데, 막상 당시 아사히신문에서는 그런 내용이 확인되지 않아 더 정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윤봉길·이봉창·백정기) 묘원 옆에는 1946년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조성됐다. 하지만 73년째 묘는 텅 비어 있다. 우선은 안 의사의 유품을 안치해 기념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하루빨리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 땅에 모셔 올 날을 고대해 본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