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정책에 공론조사 반영한 文정부 시민 신뢰도 높였지만 갈등은 숙제 향후 외교정책도 ‘시민의 지혜’ 기대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숙의(熟議)를 통한 민주주의의 질 향상. 현 정부는 정치 과정에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시행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학습과 토론에 바탕을 둔 숙의민주주의, 즉 공론조사다. 이 제도는 정치권과 관료가 독점해 온 정책 결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과정을 공개해 정책의 정당성과 책임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다. 좋은 민주주의란 결국 어떤 위치에 있고, 얼마나 가졌는가에 관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표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므로 이 시끄러운 절차를 거쳐 합의에 도달하고, 이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은 매력적이다. 전문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정책에 관여한다는, 시민 역량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어 희망적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이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보고를 수용해 건설 재개를 결정했을 때, 찬사와 기대가 넘쳐났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현장에 있으면서 다소 다른 생각을 했다. 시민이 국가 중대사를 자유롭게 토론해 그 기록을 정치 지도자가 참고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도입된 공론조사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재개와 반대로 갈린 양측의 갈등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최종 승자는 정치적 결단을 시민사회에 전가한 대통령과 관료뿐이란 비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신고리 공론화가 채택한 표결에 의해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방식은 여러 공론조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실 숙의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학습과 토론이 이뤄지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정에서 산출된 기록은 최종 결정 시 유용한 자료로 활용된다. 즉 숙의민주주의의 핵심은 승자와 패자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기존 공론화는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 중 누가 이길지를 선택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공론조사라는 민주주의의 질과 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제도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 충실한 학습과 토론을 통해 창발할 수 있는 시민의 지혜를 포기한 것이다.
승패만이 중요해지면, 공론조사의 의제와 시행 여부를 정할 때 정치인, 관료, 당사자의 이해와 탐욕이 개입할 가능성도 커진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정책 결정 과정의 정당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공론조사가 아니라 정치인의 책임 전가용, 관료의 면피용, 이해집단의 명분 쌓기용으로 악용될 수 있다. 공론조사는 자주 열리지만, 실제 정책에 반영할 숙의의 기록은 영원히 묻힌다. 이긴 자와 진 자, 지지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 관계자의 자화자찬만 남는다. 국민은 이런 공론조사의 결론을 알고 싶지도 않고 수용할 이유도 없다.
물론 희망적인 사례도 존재한다. 외교부의 국민외교. 모두에게 생소할 이 제도는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함으로써 정책의 장기적 안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외교부는 올 2월 ‘외교정책에 대한 시민 참여형 정책선호조사’를 수행했는데, 이 조사가 차별성을 가지는 이유는 그 목적이 갈등의 단기적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향후 외교 방향과 내용을 정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시민들의 학습과 토론을 통해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 중 찬반의 부침이 유독 심하고 그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는 분야가 외교와 대북 정책이다. 외교정책의 책임성을 시민의 힘으로 세울 수 있는 이 실험이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질 향상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일본군 위안부 협상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한일, 한중 관계가 날로 악화되고 있다. 그 당시 외교부가 현재의 외교부였다면 동북아 외교 지형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외교부의 기본에 충실한 창의적 시도를 정치권과 다른 관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