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 명의 탈북자 출신 기자가 북한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숙청 바람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먼저 동아일보의 주성하 기자가 지난달 30일 ‘서울과 평양사이’ 칼럼에서 여섯 사람을 거론했습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 간여했던 김성혜 통전부 통일전선책략실장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고,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추방되었으며,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도 취조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미국통인 한성렬 외무성 부상이 총살됐다는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책임을 지고 통전부장 자리에서 내려온 김영철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사단의 몰락이라는 것입니다.
다음날인 31일자 조선일보 1, 3면을 통해 김명성 기자는 ‘북한 소식통’을 소스로 한발 더 나갔습니다. 김영철은 자강도 노역형에 처해졌고 김혁철은 총살되었으며 김성혜와 신혜영(하노이 김정은 통영사)은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졌다는 겁니다.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도 근신에 처해졌다며 2013년 12월 장성택 처형 이후 처음으로 노동신문에 “반당, 반혁명, 준엄한 심판” 등의 표현이 등장했다고 함께 전했습니다.
올해 1월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면담하는 북한 대표단. 오른쪽부터 통일전선부장에서 해임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지방으로 추방된 박철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수용소에 끌려간 김성혜 통전부 실장,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 댄 스커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 트위터, 동아일보 DB.
저 역시 2월 28일 하노이 북-미 2차 회담이 결렬되는 그 순간부터 상당한 기간 동안 평양에서 ‘수령의 잘못’을 대신 짊어질 엘리트 숙청 바람이 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fact)이라고 할만한 것은 김영철이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유지하면서 통전부장 자리에서는 내려왔다는 4월 24일 국정원 국회 보고가 전부입니다. 청와대와 통일부 등이 김혁철 처형 등 보도에 대해 신중한 반응인 가운데, 3일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김영철이 김정은과 함께 군 예술공연 관람을 했다고 전했고 ‘김영철의 자강도 노역형’ 보도의 신빙성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를 포함해 다른 인사들의 현재 상황이 확인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북한 당국이 최근 밖으로 통하는 문을 꽁꽁 닫아놓고 지난해 이후 북-미, 남-북 대화의 전 과정을 철저하게 ‘총화’ 및 ‘검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방북했던 한 해외동포 단체 관계자는 “아태(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도 완전히 닫혔다. 연말까지 남북관계는 어려울 것”이라며 평양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전했습니다만 숙청설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북미 대화도 올 스톱 상황입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동아일보 DB.
브레진스키의 연구 등을 이론적 자원으로 북한의 숙청을 연구한 허정범은 2005년 12월 경남대 북한대학원에 제출한 ‘북한의 숙청 연구-기능과 유형을 중심으로’에서 북한의 숙청에는 더한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에서의 숙청은 조선노동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서 나아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권력의 획득과 유지, 공고화, 심지어 권력 승계에 성공적으로 활용한 측면이 있다”며 “북한의 역사는 곧 숙청의 역사”라고 썼습니다.
허정범은 1948년 북한 건국이후 김씨 부자에 의해 자행된 다양한 숙청을 ①정권 장악형 ②권력 유지형 ②후계 구축형이라는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6·25전쟁 이후 소련파와 연안파(중국파), 남로당파에 대한 김일성의 숙청은 권력 장악형 숙청입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숙청 사건은 김일성의 권력 유지형 숙청입니다. 1967년의 갑산파 숙청, 1969년의 군부 숙청의 경우 김정일에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한 후계 구축형 숙청으로 분류됩니다. 소련 등에서의 ‘공산당 권력 유지’라는 다소 공적인 목적과 달리 북한에서 숙청은 김 씨 일가 세습체제의 수립과 유지, 승계라는 ‘사적 이익’에 활용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 누군가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의 책임을 김정은 대신 짊어진다면, 이번 숙청은 어느 부류에 들어가게 될까요? ①과 ②사이에 정도에 해당하는 ‘권력 공고화를 위한 숙청’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집권 8년째, 외형적으로는 김정은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나이나 권력기반, 개인적인 자질, 자신의 지도 사상이나 조직 구축 등을 고려할 때 아직은 완전한 권력 장악이 아닌 권력의 공고화 단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2013년 12월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성택. 동아일보 DB.
결국 김정은은 하노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당한 모멸의 책임을 엘리트들에게 전가하면서 혹시나 자기를 비웃고 깔볼 수 있는 여타 엘리트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겁니다. 숙청의 목표는 당사자들이 아니라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다른 엘리트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고모부 장성택을 죽여 권력 장악의 마지막 수순을 밟았던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김정은의 상황 인식에 따라 이번 숙청의 범위나 강도가 더 넓고 강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모든 것이 향후 대남, 대미 전략에 연동이 될 것으로 봅니다. 김정은은 올해 말까지를 명시해 ‘미국의 변화를 기다겠다’고 한 상황입니다.
할아버지 김일성은 숙청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만들고 유지하고 아들 김정일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모든 부문에서 할아버지 따라하기를 하고 있는 김정은은 숙청의 기술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요. 북한 현대사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생긴 셈인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숙청이란 수단은 같지만 과거와 지금의 정치적 맥락과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항일투사로서의 경력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운 김일성과 그의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3대째 물려받은 김정은은 정당성 차원에서부터 같은 위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