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여자오픈 골프]신인 이정은, 메이저 우승으로 첫승 4세 때 트럭 사고로 장애입은 부친, 딸의 운전기사로 대회마다 동행 형편 어려워 美진출 망설였지만 “하고 싶은 일 하라” 적극 권유
이정은에게 행운의 숫자는 7이 아닌 ‘6’이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등록명인 ‘이정은6’를 시작으로 6과 인연을 맺은 그는 2017년 KLPGA 최초의 6관왕에 이어 올해는 첫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우승을 최고 권위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6언더파로 장식하며 정점을 찍었다. 최종 라운드를 단독 선두로 마친 뒤 18번홀을 떠나는 이정은. USGA 제공
“집안이 부유하지 못해 골프를 너무 힘들게 쳤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3일 끝난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직후 이정은에게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눈앞을 스쳐가는 듯했다. 대회 기간인 지난달 28일이 생일이었던 그는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딸이 네 살 때 덤프트럭 기사로 일하다 30m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고교 시절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대한골프협회의 지원으로 그의 골프교습에도 숨통이 트였다.
2016년 KLPGA 신인상을 받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이정은.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2관왕이 된 이정은은 2016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신인상을 차지했다. 당시 2억5000만 원의 상금을 받은 그는 경기 용인에 전셋집을 마련했고 아버지에게는 전동 휠체어를 사드렸다.
사고 전에 조기축구회 골잡이였을 만큼 운동신경이 좋았던 아버지는 딸의 권유로 탁구 라켓을 잡았다. “정은이가 이젠 아빠가 좋아하는 걸 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지난해 이정은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을 수석 합격한 뒤 고민에 빠졌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그 곁을 지키는 어머니를 두고 떠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효녀 이정은의 마음을 움직인 건 아버지였다. “우린 괜찮다.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나거라. 그게 도움 주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US여자오픈 우승 후 인터뷰를 사양한 아버지 이 씨는 “너무 큰 걸 해내서 가슴이 벅차다. 주인공은 정은이다.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고 말했다. 어머니 주은진 씨는 “딸이 미국에서 일정한 거처도 없이 숙소를 옮겨 다녀 변변한 반찬도 하나 못 보내줬다”며 울먹였다.
골반과 허리를 지지하는 코어 근육 강화에 효과적인 케틀벨 스윙 운동을 하고 있는 이정은. 그는 스쾃(역기를 어깨에 걸치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운동)을 95∼100kg 들어올릴 정도로 남다른 파워를 길렀다. 정상욱 트레이너 제공
현지 시간으로 오후 10시가 다 돼 공식 일정을 마친 이정은은 호텔 방에서 두 명의 매니저와 룸서비스로 초밥을 주문해 조촐한 축하 파티를 했다.
앞서 기자회견에선 “상금(100만 달러)으로 한국 라면을 먹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지난해부터 큰 대회를 앞두고는 일주일에 두세 번 먹던 라면에 콜라도 멀리하며 집중했다. 이정은은 “좋아하는 걸 끊고 뭔가를 하면 동기부여가 된다. 우승하면 라면부터 먹고 싶었다”며 웃었다.
이정은은 KLPGA투어에 등록할 때 동명이인이 많아 이름 옆에 숫자 6을 부여받았다. 앞서 이정은(43), 이정은2(42), 이정은3(34), 이정은4(32), 이정은5(31)가 있다. 이 중 투어에서 활동하는 선수는 이정은6와 함께 이번 US오픈을 공동 34위로 마친 이정은5뿐이다. 이정은의 별명 ‘핫식스’는 선배 김세영이 붙여줬다. 이정은의 팬 클럽 이름은 ‘러키 식스’다.
이정은은 LPGA투어 상금 1위, 올해의 선수 2위에 나섰다.
한편 대회에 앞서 타이거 우즈의 전 코치 행크 헤이니는 “이름 모를 한국 이 씨의 우승을 점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결과적으로 적중한 셈이 됐다. 이정은은 “난 영어를 잘 몰라서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