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돌 맞아 주역 왕단 e메일 인터뷰
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 진압에 나선 4대의 중국군 탱크를 한 남성이 홀로 막아서고 있다. 베이징=AP 뉴시스
톈안먼(天安門) 시위의 주역이었던 왕단(王丹·50·사진) 씨는 톈안먼 사건 30주년을 하루 앞두고 3일 진행한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왕 씨는 톈안먼 시위 학생 지도부 21명 가운데 한 명으로 단식 농성을 주도했다. 그해 6월 4일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 이후 1990년대 ‘정부 전복 음모’ 혐의 등으로 총 7년간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갔고 현재 미국에서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톈안먼 시위가 오늘날 중국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자 “정치문화 면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중국 민주화의 장애요소로 “개인과 국가가 너무 가까웠다”며 ‘시민사회가 발전할 공간이 없었던 정치문화’를 꼽았다.
그는 “톈안먼 시위에 대한 피의 진압이 (그때까지의) 개인과 국가 관계를 철저히 바꿨다”고 말했다. “1980년대 진보적으로 보였던 정부가 통치하기 위해 폭력적인 치국(治國)의 옛 길로 돌아가자 정부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고 1990년대 정치에 대한 냉담을 낳았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왕 씨는 “(이 때문에) 최소한 국가(정부)는 이데올로기로 정치적인 동원을 하기가 어려워졌고 개인과 국가의 거리가 천천히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맞은 느낌은….
“올해 기념활동을 더 크게 잘하자는 것 외에 특별한 소감이 없다. 30년 동안 내게는 매일이 기념일이었고, 이는 하루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순진했지만 공산당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우리는 나라가 더 좋게 변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그래서 그 희망을 행동으로 실현하기를 바랐다.”
―당시 무력진압으로 인한 희생자 수가 정확하지 않다.
“당국은 최대한 사상자 수를 감추려 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오히려 사상자가 매우 많다는 걸 증명한다. 단지 수십 명이 사망했다면 감출 필요가 없다.”
―현재 중국 젊은이들은 톈안먼 시위를 잘 모르는데….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톈안먼 시위가 역사에서 잊혀질 것이라고 걱정하지는 않는다. 민주화가 이뤄지면 톈안먼 시위는 역사에 공정하게 기록될 것이다.”
중국은 톈안먼 사건 30주년을 앞두고 기념행사는 물론이고 소셜미디어, 인터넷에서 관련 언급 자체를 강력하게 검열하고 있다. 최근 취재진이 톈안먼 광장을 찾았을 때 보안 검사 과정에서 기자의 거류증(비자)을 본 공안(경찰)은 “목적이 취재인지 관광인지 알 수 없다”며 사실상 출입을 막았다. 평소에는 외신 기자들이 톈안먼 광장을 출입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중국 외교부 겅솽(耿爽) 대변인은 3일 정례 브리핑에서 톈안먼 시위를 “1980년대 말 발생한 정치 풍파”로 지칭하며 “신(新)중국 성립 70년 만에 이룬 엄청난 성취는 우리가 선택한 발전 경로가 완전히 옳았음을 증명한다”고 밝혔다. 웨이펑허(魏鳳和) 중국 국무위원 겸 국방부장도 2일 “정부가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감한 (진압)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중국 지도부의 현재 인식을 드러낸 말이었다.
베이징=윤완준 zeitung@donga.com·권오혁 특파원